내 생일 기념으로 2박 3일 동안 우리 부부는 남도 여행을 승용차로 다녀왔다. 이 나이에 승용차를 몰고 땅 끝까지 다녀온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집사람이 말렸으나 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승용차를 몰고 남도여행을 다니고 싶은 마음을 오랫동안 품고 있다가 이번에 결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남도지역에 일부인 해남과 강진을 여행지로 택한 이유는 조정래의 소설 ‘한강’을 읽으면서 느낀 친근감에,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으면서 더 깊은 매력을 느낀 탓이다.

사실, 15년 전에 그 지역을 30여명의 교인들과 한번 다녀온 적이 있었다. 유홍준 교수의 책이 일러준 대로 월출산 도갑사, 두륜산 대흥사, 윤선도 유물전시실, 다산 정약용의 초당, 유명하다는 비석과 현판 글씨 등, 그 지역의 풍광(風光)과 유물을 돌아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교인들을 대동한 지도자의 입장은 언제나 그들의 안전을 신경을 쓰다 보니 늘 긴장할 수밖에 없음으로 무엇이나 대충 보는 정도에 그쳐야 했다. 그러므로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여행객의 입장에서 그 지역을 가보고 싶은 생각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유홍준 교수의 책을 다시 읽으면 더 뜨거운 열망이 심어졌다. 유 교수의 ‘남도의 봄, 남도의 원색’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강진 땅의 모든 봄꽃이 피어 있었다. 산그늘마다 연분홍 진달래가 햇살을 받으며 밝은 광채를 발하고 있었고, 길가엔 개나리가 아직도 노란 꽃을 머금은 채 연두 빛 새순을 피우고 있었다. 무위사 극락보전 뒤 언덕에는 해묵은 동백나무에 선홍빛 동백꽃이 윤기 나는 진초록 잎 사이로 점점이 붉은 홍채를 내뿜고, 목이 부러지듯 잔인하게 떨어진 꽃송이들은 풀밭에 누워 피를 토하고 있다.”라고 묘사했다.

그가 감탄했다는 남도의 봄, 남도의 원색을 눈여겨 보고 싶다는 열망이 6시간 승용차 운전의 피곤함을 이겨낼 수 있었다. 운전코스는 중부고속도로로 시작해서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를 통해 나주에 도착한 후 지방 국도를 따라 가는 것이었다. 지방 국도도 2차선에 불과했던 과거도로와는 달리 곧장 뻗은 4차선이 되어 있음으로 준고속도로나 다름이 없을 뿐 아니라 차량통행이 많지 않아 산천경개를 즐기며 달릴 수 있었다. 먼저 깊은 계곡에 위치한 월출산 도갑사(道岬寺)를 들렸지만, 입구에서 한 시간 정도 돌아보는 것으로 끝냈다.

오랜 시간 경내를 걸어 올라가던 과거의 기억이 우리를 매표소에서 돌아서게 만든 것이다. 입구에서 사진만 연방 찍는 우리 부부를 매표소 입구에 서 있는 스님은 이상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든 수목들이 속에는 이미 봄을 가득 품고 있는 것이 확연하지만, 아직 꽃으로 활짝 토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진달래, 개나리, 동백꽃, 산수화들이 저들의 마지막 안간힘을 북돋고 있었다. 해남, 강진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월출산을 돌아 나와 다시금 지방 국도를 달려 해남에 있는 윤선도 유적지인 녹우당에 들려 관람했다. 과거와는 달리 화려한 전시관으로 건립되어 있었다. 건물이 쇠락했기에 어쩔 수 없는 개조였으나 왜인지 거부감을 일었다. 너무나 귀한 조상의 유물을 장삿속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해남 땅 끝 마을에 위치한 토비스 콘도에 도착한 것은 오후의 태양이 다소 기운을 잃은 때였다. 구지 땅 끝 마을에 있는 숙소를 정한 것은 우리가 콘도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회사가 호남지역에 체인으로 맺고 있는 콘도는 이 곳 뿐이기 때문이었다.

예약된 콘도 409호의 커튼을 젖히자, 눈앞에 드넓은 남해 바다가 한가득 펼쳐 있었다. 오후 햇살이 바다 위를 은빛으로 도색하고 있었다.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오는 장관(壯觀)이다. 우리는 짐을 푸는 것도 잊은 채 오랫동안 바다에 매료되어 있었다. 고개 넘어 땅 끝 마을 관광지에서 생일상을 받았다. ‘종가집한정식’이라는 음식점인데 정말 한상 떡 벌어지게 차려왔다. 한상의 가격도 5만원에 불과할 정도로 저렴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반찬임에도 하나하나 음식 맛이 너무나 맛깔스러웠다. 피곤을 무릅쓰고 먼 거리를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다음날은 제일 먼저 강진에 있는 영랑생가에 들렸다. 사실, 강진읍에 있는 영랑생가는 거의 주택단지 안에 위치하고 있어서 찾기가 용이한 곳이 아니었으나 네비게이션이 여행 가이드 역할을 해주었다. 네비게이션이 인도 하는 대로 골목을 몇 번 돌고 보니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는 영랑생가가 눈앞에 있었다. 시를 큰 돌에 새겨 마당 여기 저기 세워둔 것도 인상적이었으나 뒤울안에 울창하게 뻗어 있는 대나무 숲의 정취가 시심(詩心)을 자극하게 만든다.

강진에서 되돌아 두륜산 대흥사로 향했다. 계획은 사찰 경내를 걸어서 일지암까지 오르고 싶었으나 케이불카가 설치되었다는 안내문에 혹해서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대흥사와는 달리 두륜산 정상에 오르는 코스였다. 비록 봄바람이 찼지만 높은 정상에서 바라보는 해남 강진의 산하는 산수화 그대로였다. 무엇보다도 두륜산 여행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점심식사였다. 주차장 부근에 있는 음식점에서 산채비빔밥과 더덕구이를 시켰는데 너무나 많은 반찬이 나왔다. 최근래 우리 부부가 그렇게 맛있게 먹기는 처음이랄 정도로 뛰어난 맛이었다.

셋째날 이른 아침 서울로 떠나면서 다산 정양용의 초당도 들리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대신 담양에 있는 소쇄원을 찾기로 했다. 과거에 너무나 인상이 좋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도를 따라 여러 시간을 달려 소쇄원에 도착했으나 너무나 기대했던 탓인지, 아니면 세계 유명하다는 곳을 다닌 안목(眼目) 때문인지 실망만 안고 돌아와야 했다. 그럼에도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 뿌듯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 나이에 손수 승용차를 몰고 남도의 봄 속에서 남도의 원색과 꽃들, 그리고 진한 인정과 맛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