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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말은 많이 할수록 좋다
[20대에 반드시 해볼 6가지 도전 ⑤]
2008년 05월 27일 (화) 08:57:45 정은혜 webmaster@cry.or.kr

고객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들에게 내가 꼭 하는 말이 있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표현하라는 것이다. 사회뿐만 아니라 가족 내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은 내가 원하는 바를 얻는 것은 물론 상대방이 바라는 비를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아무리 부모라도 자식의 마음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다. 표현도 하지 않으면서 나를 알아주기 바라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내가 바로 그랬다. 부모님은 항상 바빴고 내게 집중할 여유가 없었다. 어린 나는 내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 슬픈 시간들을 보내곤 했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이 컸다. 하지만 이제는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는 걸 안다. 어머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해한다. 그러고 나니 원망이 아닌 존경의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 가족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이었다.

나는 강요에 의해 예배드리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코앞에 있는 교회에 가는데도 자꾸 지각을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따끔하게 야단을 치곤했다. “지각하면 하나님이 노하셔. 이젠 너, 내 딸 아니야.” 그 말은 어린 나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 그때 어머니가 나한테 원했던 건 성실한 예배 태도였고 죄책감을 심어주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울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난 엄마 딸 아니야. 내가 필요 없어지면 엄마는 언제든지 날 버릴 거야.”

어머니는 참으로 약한 분이었다. 하지만 교회 일만큼은 늘 억척스러웠고 아무리 몸이 아파도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면 열성적이었다. 그렇게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는 어머니였지만 가족들 앞에서는 연약함을 감추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 어머니는 늘 앓아누워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밖에서 돈을 버느라 힘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식들을 잘 보살펴주는 것도 아니면 서 왜 그렇게 피곤한 삶을 사는지 답답했다.

나는 늘 어머니와 함께 있었지만 어머니의 품이 언제나 그리웠다. 다가가 곁에 눕고 싶었지만 하루하루가 힘겨웠던 어머니는 그런 내가 귀찮고 버거울 뿐이었다. “은혜야, 저리 가라. 엄마 피곤하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벽을 쌓아갔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따뜻한 한 번의 포옹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어머니는 날 강하게 키우려고 일부러 애 정을 감추었던 것일까. 하지만 표현하지 않는데 어떻게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어머니는 교회에 오는 아이들과 나를 다르게 대하지 않았고 다른 어머니들처럼 자상하게 딸을 안아주지도 않았다. 필요해서 찾을 때마다 바쁘다며 나를 외면했다. 떡 하나가 있으면 내 앞에서 다른 아이한테 그 떡을 주었고, 돈이 있으면 내가 아니라 그 아이들에게 가방을 사주었다. 어린 나는 정말로 두려웠다. 내가 받아 마땅한 모든 것을 다른 아이들에게 줄까 봐, 내 작은 소유물마저 가져갈까 봐 걱정이 되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뭔가를 바라면 바랄수록 나는 외로운 아이가 되어 갔다.

1999년 12월 기도원에 들어가 1주일간 금식기도를 했다. 소원 기도의 제목은 ‘부모에 대 한 용서’였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을 품고 살아가는 일은 나를 한없이 비참하고 힘들게 했 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원망과 미움으로 인해 삶을 지탱해나 가지 못할 지경에 이른 나는 결심을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겠다고. 내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금식기도는 내 삶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기도가 끝났을 때 항문이 찢어져 있었지만 부모님으로 인해 마음속에 맺힌 슬픔에 비하면 그 정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병원에 예약을 하고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 가기로 했다. 그 날 아침 10시, 병원에 갈 준비를 하는데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한태 물었다. 노래를 부르기 위해 성가대에 갔다고 했다. 다고 했다. 그 순간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필요할 때마다 곁에 없는 어머니. 슬픔이 밀려왔다. 어머니의 신앙이란 과연 무엇인지 , 도대체 날 자식으로 생각이나 하는지…….

그러나 이런 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어느 날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캐나다에 있을 때 토론토 대학 학생 기숙사로 이사한 뒤였다. 화장실과 부엌이 딸려 있는 작은 방이었는데 캐나다에 와서 처음으로 요리를 했다. 비좁은 부엌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던 어느 날,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나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여자로서 어머니를 떠 올렸다. 얼마나 힘든 삶이었을까.

가난한 목사의 아내이자 네 아이의 어머니. 약한 몸을 이끌고 삶을 꾸려온 어머니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20년 동안 작은 교회의 두 평짜리 부엌에서 가난한 동네 청년들과 신도들, 우리 여섯 식구를 위해 매일 밥을 짓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루 3천 원으로 차려야 하는 세 끼 밥상, 석유곤로에서 요리를 해야 하는 불편함,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아 겨울에도 찬물로 설거지를 해야 했던 일……. 항상 내일 먹을거리에 집착하던 어머니였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두 달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니고, 그릇이며 이불, 탁자가 없어서 여기저기 얻으러 다니고, 새벽에 나가 남이 내다버린 살림살이들을 주워오는 내 모습이, 돈이 없어서 끼니를 걱정하는 내 모습이, 그래도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내 모습이, 30 년 동안 그렇게 살아온 어머니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사람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다. 어머니의 삶은 신앙이 전부였고 다른 곳에 에너지를 쓸 여력이 없었다.

어머니에게는 자녀보다 신앙이 중요해 보였고 그것은 커다란 의문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머니는 자신이 너무나 약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신앙의 힘으로 버티어온 것이다. 어머니 역시 연약한 여자였다. 슬프면 울고 힘들면 찌증을 내는 한 인간이었다. 늘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자식들이 바라는 바를 충족시켜줄 여력이 없었다. 먼 타향에서 어머니와 떨어져 있으면서 비로소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한 여자로, 한 인간으로 어머니를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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