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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딪혀라, 아니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20대에 반드시 해볼 6가지 도전 ④]
2008년 05월 24일 (토) 11:41:34 정은혜 webmaster@cry.or.kr

배낭여행을 통해 언젠가는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단순히 외국을 여행하는 일과 외국에서 사는 삶은 어떻게 다를지 궁금했다. 그즈음 한비야의 책에서 눈에 띄는 문장을 발견했다. “외국에서 고생한 1년은 한국에서 고생한 6 년과 같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말이 있듯이 고생도 빨리 해보고 훗날 안정감 있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0년 9월, 대학을 졸업한 지 2년 후 나는 캐나다 매니토바 주 위니펙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1년간 캐나다의 작은 도시에서 살면서 값진 경힘을 했다.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고, 배우고 깨지면서, 백인들의 문화와 그들의 가치관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굴 흰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사대주의가 무너졌고 고정관념이 깨졌다. 인생에 대해 내가 너무 교만했다는 깨달음도 얻게 되었다.

무엇보다 사계절을 가진 우리나라가 참으로 축복받은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냈던 위니펙은 9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눈이 내리는, 시베리아만큼 추운 곳이었다. 평균 기온은 영하 15도, 거리에 쌓인 눈이 거의 무릎까지 닿곤 했다. 한국 남자들이 참으로 매력적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또한 어린 시절 나를 방치하고 항상 바쁜 모습만을 보여주었던 부모님에 대한 원망스러운 마옴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나는 더 이상부모님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살아갈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더 나아가 뚜렷한 직업관을 갖게 되었다. 캐나다 행을 결정했을 때 내 통장에는 250만 원이 들어 있었다. 그것이 내가 가진 돈 전부였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일단 떠나고 보자고 마음을 굳혔다. 캐나다에 가서 학교 등록을 하고, 학비가 떨어지면 워킹비자로 취직해 돈을 벌면서 1년만 버텨보자는 게 나의 목표였다. 나는 특히 독립심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낯선 땅에서 혼자 살아갈 1년은 나 자신을 바꾸고 나의 미래를 풍요롭게 해줄 거라고 확신했다.

위니펙에 도착한 첫날 아무도 나를 마중 나오지 않았다. 나를 마중 나오기로 했던 도우미는 그 시간 다른 지방에 가 있었다. 남자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첫날은 공항 앞 호텔에서 묵었고, 외국인 교회의 도움을 받아 숙소를 구했다. 그 뒤 직업학교인 위니펙 테크니컬 칼리지에서 서버 과정을 공부했다. 내가 전공한 분야는 요 식업의 고객서비스로 한국에서 꼭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그 동안은 기획이라는 정신적인 노동을 했기 때문에 다소 육체적이고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서비스 분야 일을 꼭 해보고 싶었다. 물론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캐나다 문화와 역사 요리법 와인의 특징, 고객 접대법, 서버로 팁을 많이 받는 방법 등을 배웠는데 무척 재미있었다. 약 두 달간의 교육 과정이 끝난 후에는 인턴으로서 쉐라톤 호텔의 연회 서버로 취직했다. 호텔 연회는 대개 저녁에 있었기 때문에 저녁 5시에 출근해 새벽 3 시까지 일했다.

처음에 위니펙에서의 삶은 새롭고 다이내믹하며 재미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돈을 벌기위해 고군분투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회의가 들었다. 오로지 생계를 위해 하루를 소모하는 노동자의 삶이었다. 하루하루가 투쟁이며 스트레스였다. 손님들의 요구나 매니저의 지시를 제대로 알아듣고 해결해야 했으므로 신경이 몹시 예민해졌다. 엄연한 일터에서 외국인이라 영어에 서툴다는 걸 이해해주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들만이 쓰는 낯선 현장 용어들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완벽하지 않은 영어 때문에 해고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마음에 가득했다. 결국 돈을 벌기 위해서는 영어를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당장 생활비를 벌어야 했으므로 연회가 없는 낮에는 호텔 내의 선물가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팀홀튼이라는 베이커리 카페에도 취직해 두 가지 일을 병행했다. 카운터에 서서 하루 150명의 주문을 받고, 샌드위치를 만들고, 설거지를 했다. 이런 식으로 캐나다에서 1년 동안 했던 일은 모두 일곱 가지 정도다.

취직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워킹비자가 내 전 재산이었기 때문에 틈틈이 신문의 구인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들고 매니저들을 찾아다녔다. 때로는 길을 가다가 아무 레스토랑이 나 들어가서 매니저를 불러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청했다. 돈이 절실했기에 나온 용기였다. 그러나 캐나다 현지에서의 경력도 없고 어눌한 영어를 쓰는 내게 일자리를 주는 매니저는 없었다. 그렇게 거절당하는 경험이 쌓이면서 나만의 노하우가 생겼다.

캐나다인 매니저의 입장에서 나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매니저가 원하는 대답을 준비해 정확히 외워갔다. 인터뷰를 마치고 채용하겠다는 매니저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은 험하더라도 시간 내에 좀 더 많은 돈을 받고 다양한 고객들을 만날 수 있는 일을 끊임없이 찾아다녔다.
이렇게 나는 쉐라톤 호텔의 연회 서버로 시작해서 호댈 선 물 가게 점원, 커피숍 프론트, 코트 체크, 24시 잡지서점 점원, 샌드위치 가게 점원, 스타벅스의 프론트까지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단 1달러라도 팁을 주는 손님은 잊을 수 없을 만큼 고마웠다. 재미있는 일도 많았지만 힘든 일도 적지 않았다. 팀홀튼에서는 동료 선배들의 텃세로 나흘 내내 화장실 청소만 한 적도 있고, 팁을 잘 주는 손님이 오면 갑자기 나타나 자기가 서빙을 하겠다며 나서는 동료도 있었다. 선물가게에서는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물건을 닦는 게 서툴다고 매니저로부터 핀잔을 들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셈이 맡지 않아 가게 문을 닫고도 한두 시간씩 혼자 남아서 그날 들어온 동전을 세기도 했다.

스타벅스에서는 질문을 너무 많이 해 귀찮게 한다고 해고당했다. 어느 날 매니저가 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그레이스, 아무래도 너는 이 일에 맞지 않는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은 카페 마키아토를 만드는 데 1 분이면 되는데 너는 왜 3분이나 걸리지? 더 이상 너를 데리고 있을 수 없다.” 일방적인 해고 통보였다. 나는 하루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일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날씨에 적응하고 살 집을 구하고 인관관계를 맺고 교회에 다니고 취미활동을 하는 모든 것들이 협상과 전투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들이었다. 물론 스트레스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 8개월간 다닌 외국인 교회에서는 캐나다 청년들과 모임을 가지고 1주일에 한 번씩 성경 공부를 했다. 함께 어울리는 동안 인종과 나이에 상관없이 타인을 편하게 대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배웠다.

시간을 무척 소중하게 여기는 사고방식도 배웠다. 홈스테이를 했던 두 군데 가정에서는 소박한 일상과 화목한 가족의 소중함을 체험했다. 하루하루에 충실하며 작은 일에도 크게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다 행복해졌다. 출소자들을 돕는 단체 유니언 가스펠 미션에서 봉사할 때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법을 배웠다. 휴먼리소스센터 소장이었던 밥도 잊을 수 없다.

그는 캐나다에서 직업을 얻는 법, 면접 잘 보는 법,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쓰는 법 등을 가르쳐주는 ‘직업 매니지먼트 3주 과정’에 무료로 참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특히 직업을 찾는 동안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었고 내가 거절당할 때마다 “그레이스, 포기하지 마.”라고 격려해 주었다. 1년간의 캐나다 생활은 하루에도 수없이 희비가 엇갈리는 고생스러운 삶이었지만,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기에 기꺼이 즐겼다.

돌이켜보면 정신적, 경제적으로 독립심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가난한 삶은 행복을 누릴 기회를 앗아간다는 사실도 절실히 깨달았다. 일은 삶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니지만, 가난하면 평생 일만 하다가 소중한 인생을 끝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쉐라톤 호텔에서 만난 필리핀 청년을 잊을 수 없다.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는 내게 그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너처럼 한국에서 왔어.” 그는 한국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캐나다로 왔다고 했다.

내가 또 물었다 .
“캐나다, 필리핀, 한국 가운데 어느 나라가 가장 살기 좋았어?” “그레이스, 나는 필리핀에서 의과대학을 다녔어. 그러나 너무 가난했지.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가서 불법 노동자가 되어 24 시간을 공장에서 지냈어. 하지만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오랫동안 일할 수 없었지. 그래서 캐나다로 왔는데 여기서도 건물 청소부로 하루 열다섯 시간씩 일하고 있어. 한국이나 캐나다나 내겐 마찬가지야. 환경이 좋은지 나쁜지 따질 여유가 내겐 전혀 없었어.”

파랑새를 찾아 떠나온 캐나다. 그러나 캐나다에서도 그나 나나 생계를 위해 끝없이 일해야 했다. 먹고살기 위해 나 역시 하루 열다섯 시간씩 노동했지만 1년 후에도 여전히 가난했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힘든 하루 일을 끝내고 나오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캐나다의 맑고 푸른 하늘은 아름다웠다. 일에 시달리느라 빼앗긴 생기가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캐나다의 하늘은 내게 말하고 있었다.

“주어진 인생 동안 얼마나 돈을 벌지를 정하고, 자연과 더불어 인생을 즐겨라.”

인생이라는 큰 어항에 노동이라는 물고기만 키운다면 얼마나 삭막한 삶일까. 캐나다에서의 마지막 한 달, 나는 노동으로 지친 내게 잊을 수 없는 선물을 주기로 했다. 바로 캐나다의 자연이라는 선물 이었다. 퀘벡, 오타와, 밴쿠버, 토론토를 여행하며 자연에 심취하고 휴식을 얻었다. 자연을 즐기는 능력이야말로 행복한 인생에서 놓칠 수 없는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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