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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유혹 손길 뻗어도 하얀 순결을 지켜야
[젊은 크리스천에게 보내는 엽서 ④] 사랑은 아름다워라
2008년 01월 10일 (목) 12:59:55 김태복 발행인 hipc6012@cry.or.kr

독신을 꿈꾸던 시절

나는 20대 초반 시절, 너무나 이상(理想)에 불탄 나머지 독신을 꿈꾸던 때가 있었다. 그러한 극단적인 이상을 내게 강하게 영향을 준 것은 구라다 하구조오(倉田百三)의 「사랑과 인식의 출발」이라는 책이었다.

   
▲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의 한 장면 ⓒ 씨네2000
그 책의 '지상의 남녀'라는 제하(題下)의 글 중에는 이런 내용이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 왔었다. <나는 어떠한 경우든, 부부나 애인끼리라도 성교는 절대적인 악이라고 믿고 있다. 사랑이 없는 성교는 하고 싶지 않다' 이 말은 흔히 듣는 말이다. 그러나 사랑을 하더라도 성교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습도 개념도 아니다.

성교 그 자체의 경험에서 나오는 실감에 근거를 두고 하는 주장이다. 승려가 여자를 금하는 것은 성교,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마태복음에서 '무릇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한 것이니라'하고 말한 것은 결코 도덕의 이상으로서 지나치게 엄중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상을 순수하게 지키면 성욕은 어떠한 경우에도 악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래가지고는 자손이 생기지 않아서 인류는 전멸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가령 인류가 전멸할지라도 악은 악이다. 마치 다른 생물을 죽이지 않으면 인류는 전멸하겠지만, 살생이 악인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이다. 나는 인생에 두 가지의 최대 해악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성교를 하지 않으면 자식을 낳을 수 없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살생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라 했다.

이제 결혼한 지 거의 30년이 되어서 3명의 자녀 중 두 명은 결혼하고 하나는 결혼 적령기에 있는 입장에서 이런 글에 접했다면 '이런 철따구니 없는 자가 다 있는가?'라고 코웃음 치며 읽기를 포기했을 것이나, 그 당시에는 위의 표현대로 비수처럼 찔러오는 글이었던 것이다. 솔직히 고백한다면 대학 1년 때까지 나는 연애의 경험도, 성(性)에 대한 경험도 없었고, 아예 그런 면에는 눈이 띄지 못한 문외한(門外漢)이었다. 그러나 지식적으로는 중학교 때 이미 성인(成人) 잡지를 읽고 있었기에 머리는 무엇인가 알고 있다고 혼자 비밀히 웃고 있었다.

전쟁 이후에 내가 성장한 춘천이라는 소도시는 미군 기지가 있어서 많은 창녀들이 들끓고 있었고 온갖 음란한 장면이 기재된 미군 잡지나 만화, 혹은 그 당시 성인 잡지인 '아리랑' 따위를 보면서 머리는 온갖 음란이 얼룩지고 있었다. 대학에 와서는 마구 읽어대는 소설과 영화로 인해서 스스로 꽤나 성에 눈뜨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 2년 때, 나는 군(軍)에 학보병(學步兵)으로 입대했는데, 어떤 부대에 배치된 어느 날 밤, 막사(幕舍)에서 취침할 때, 옆에서 함께 담요를 덮고 자던 고참 병사가 내 성기(性器)를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흔들기도 하는 등 하는 것을 깨닫고 거부했으나 그는 끝까지 장난질을 계속함으로 결국 사정(射精)하고 말았다.

그것이 최초의 수음(手淫)의 경험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의가 얼룩지는 몽정(夢精)의 부끄러운 체험은 있었으나 새로운 수음에의 체험은 강한 죄의식이 동반된 육체의 어떤 경이로움이 뒤섞여 성의 새 면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 고참 병사에게는 대단히 화를 냄으로 다시는 그런 반복을 못하게 했고, 또 어릴 때부터 청교도(淸敎徒)적인 신앙교육에 의해 성장된 터라 결혼하기까지 어느 여인, 어느 창녀와의 성적인 경험은 가지지 않았을 지라도, 그 이후 나는 숱한 수음의 경험을 하고는 했다.

때로 소설 속에서 음란한 장면을 읽다가, 혹은 영화관에서의 노골적인 성희(性戱)의 장면을 보고 심한 충동에 휩싸여 결국 수음으로 그 충동을 배설해 버리고는 너무나 죄의식에 들떠서 이 더러운 육체의 쓴 뿌리를 욕하기도 하고, 혹은 끝없이 거리와 뚝 길을 배회하고는 했고 어느 날은 하나님께 집중적으로 극기할 능력을 주시기를 간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번번이 실패했고, 그것은 내가 위대한 성자(聖子)가 되고 싶은 어떤 꿈을 물거품처럼 만들어 버리고 하던 사슬과 같았다. 그런 심한 갈등의 시절에 「사랑과 인식의 출발」이라는 책은 엄청난 충격과 떨리는 동감을 주었던 것이다.

<여자에 대해서 성욕을 일으키고 있을 때에는 그 사나이의 마음은 여자를 축복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죄가 된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기 전에 놀려대는 심보와 남자가 자기가 범할 여자에 대해서 성교하기 전에 여러 가지 나쁜 장난을 하는 마음은 매우 흡사하다. 모든 정복 의식은 성욕을 흥분시킨다>, <이따금 수음하는 사람은 될 수 있는 한 참혹한 성교를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으면 성욕의 흥분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서로 연애하는 남녀는 성교를 피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들의 연애를 더럽히고 있음을 깨닫고 배척해야 한다>등등, 끝없는 그의 글들이 내게는 산 교훈이 되어 왔고 감동을 일으켰다.

나는 그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대오각성하고 일생 그러한 사랑이 없는 성적생활과 죄의식으로 얼룩지는 결혼을 하지 않기로 맹세를 했고 다시는 그 부끄러운 수음을 되풀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내게 자극을 주는 모든 성적인 유혹들을 피하기 위해 소설도 영화도 피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러한 거룩한 수도사적인 결심은 한 달도 못되어 무너져 내렸고 나는 별 수 없는 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젊은이들을 보는 아픔

때로 나는 오늘을 사는 한국 젊은이들을 보며 어떤 경탄을 느낄 때가 많다. 점점 무성해 가는 섹스문화의 숲에 저처럼 용케 견디어 내는 그 극기심에 대해서 말이다. 오늘의 사회는 우리가 젊은이로서 살았던 저 60년대와는 엄청나게 달라져 있다. 여기저기에 무질서하게 붙어있는 영화 포스터 속에는 거의 반라(半裸)의 여인이 유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거나 남녀가 자극적인 자태로 포옹하고 있고 영화관에서는 아주 노골적인 성행위의 장면이 공개리에 상영되고 있는 것이나 비디오방에서 청소년에게까지 빌려주는 성인용 비디오는 이제는 애교적인 수준에 불과하다.

이제는 언제라도 인터넷에 들어가기만 남성이나 여성의 성기를 마음대로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노골적인 성교장면들은 물론이고 세 명, 네 명의 남녀가 집단적으로 혼음(混淫)을 벌리고 있는 장면을 마구 보여주고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더 나가서는 성인의 주민등록번호만 입력시키면 마음대로 성인사이트에 들어갈 수 있고, '야설게시판'에 담긴 글들을 읽을 수 있는데, 그 글을 읽다보면 짐승이하의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 여자들, 저 남자들을 그저 본능에 따라 성관계를 맺는 것을 넘어서서 자기 누나, 심지어는 자기 어머니와 성관계를 맺는 것을 자연스럽게, 더 나가서는 마치 그런 행위가 당연한 것처럼 그려내고 있는 데는 너무나 기가 막히다.

돈을 벌겠다는 욕심으로 그런 음란한 사진들이나 글들을 공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가 우리 시대, 우리 사회가 여기까지 타락하고 있는지,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그런 음란이 극에 이르고 있는 사회 속에서 오늘의 젊은이들을 성적인 충동을 어떻게 해소하고 있는지, 그들은 우리 때에 비하면 건장한 체격과 우리보다 훨씬 일찍 눈이 뜬 섹스를 지녔을 텐데, 무슨 비술(秘術)이라도 무기처럼 지니고 있다는 것인가 하는 의아심을 가지고는 한다. 특히 한국이라는 상황은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에나 결혼이 가능한데 말이다.

이제는 성에 눈 뜨는 시기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라면 거의 15년 이상의 세월을 저리도 홍등가(紅燈街)의 거리처럼 음란의 몸짓으로 가득한 거리를 용케도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그들은 유교문화에 찌들고, 또 20대 초반에 조혼한 어른들이 개탄스러워 하는데도 남녀들이 쉽게 교제를 시작하듯이 성적인 교제도 쉽게 해버리고 일회용 휴지를 버리듯이 쉽게 잊어버리는 서구의 젊은이들의 방법을 이미 습득하고 있거나 창녀촌에서 그들의 흥분된 성(性)을 분노하듯이 터트리고는 참담한 심정으로 술에 취해 돌아오고는 하는지 파악할 길이 없다. 언제인가 우리 부부는 시내 극장에서 「더티댄싱」(DirtyDaneing)이라는 영화를 관람한 적이 있었다.

어느 여름날 풍요한 숲과 호수가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수많은 가족들이 모여들어 즐기는 내용인데 어느 축제의 날에 남녀노소가 광란하듯이 엉켜서 춤을 추는 거의 성교 전의 전희(前戱)에 가까운 노골적인 몸짓 그대로였다. 그런 남녀의 육체가 뒤엉킨 춤이 끝나고 나서도 건강한 성을 지닌 젊은이들이 온전히 순결한 성을 지닌 채 각기 침대로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바로 그러한 음풍(淫風)이 서구화의 물결을 따라 급성장한 우리 사회 속에서도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면 더욱 더 젊은이들의 성적인 몸부림은 열병처럼 번질 것이 분명하기에 젊은이들을 보는 아픔은 점점 더해가는 것 같다.

특히 그러한 성윤리가 강한 붕괴음을 내면서 무너지고 있는 윤리의 불모지에서 요셉처럼 순결을 지키기 위해 전투적인 자세로 사는 젊은 크리스천들을 생각하고 또 이제 10대의 나이에 들어선 우리 교회학교 학생들이 그러한 속에서 당할 고투를 생각하면 더욱 더 저미는 아픔을 갖게 된다. 젊은 나이에 만나는 진로문제, 학업, 군복무, 철학적인 갈등 등만으로 젊은이들의 병은 깊은데 저 소돔과 고모라처럼 성(性)의 벌거벗고 활보하며 유혹하고 강요하는 그 속에서 우리 젊은 크리스천이 당하는 고문과 같은 아픔은 너무나 잔인하다는 느낌이다.

그들은 공장에서, 전선에서, 캠퍼스에서, 고시원에서, 지하철에서 쥐오줌이 얼룩진 천정이 있는 하숙방에서 끝없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음란한 장면들과 꿈틀거리며 솟구쳐 오르는 성의 욕구들 속에 때로는 결국 무너져 버리고 머리를 쥐어뜯는 자책감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 시대보다 더 극심한 붉은 유혹과 싸우는 젊은 크리스천들에게 요셉처럼, 보디발의 저 끈질기고 노골적인 유혹의 손길이 닿은 겉옷을 집어던지고 도망쳐서라도 극복해 내기를 간곡히 충고하고 싶다.

때로는 끝내 다윗처럼 실패함으로 음란을 범하므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고 자탄(自歎)해 마지않는 그런 자리에 이를지라도 다시 일어나 좁은 길을 가며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키며 자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싶다. 그것은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날이 오듯이" 오늘의 숱한 유혹과 붉은 충동 속에서 하얀 순결을 지키는 것은 어느 날엔가 그 보석처럼 값진 결실을 하나님이 보장해 줄 것이라는 진리를 터득한 선배로서의 고백이 담긴 충고이기 때문이다.

결혼은 과연 죄인가?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배우면서 지금까지 내가 그처럼 자책하던 성적인 문제들, 내 꿈틀거리는 육체에 더 옥쇄를 채우기 위해서 더 강조한 독신주의, 일본 철학자가 심어준 '결혼은 죄'라는 관념이 상당히 큰 오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한 굳은 관념들은 무너지기 시작하고 내 마음은 열리기 시작했고 그해 유난히 추웠던 겨울에 지금의 아내가 청순한 여인의 모습으로 다가와, 그 열리고 있는 문을 더 넓게 열어주는데 도움을 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혼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심어준 새로운 스승은 중국의 신학자 '워치만-니'였다.

그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저서에서 말하기를 <성의식(性意識)은 죄가 아니다. 사람들은 배고픔을 의식하듯이 성을 의식한다. 성(Sex)도 신체의 자연적 필요다. 사람이 배고픔을 느끼는 것은 자연적인 일로써 결코 죄가 아니다. 그러나 음식을 훔칠 때에는 죄가 된다. 훔치는 것은 무언가 비자연적인 일이다. 마찬가지로, 성을 느끼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며, 죄로 간주되지 않는다. 단지 사람이 자기의 욕구만족을 위해 부당한 방법을 쓸 때에 그는 죄에 빠진 것이다. 성의식(sex consciousness)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창안하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 후가 아니라, 이전에 설
정하신 것이다.>

<음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각 남자는 자기 아내를 두고 각 여자는 자기 남편을 두라고 바울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바울은 성의식을 죄로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결혼이 음란죄를 막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고 했다. 그는 마음으로는 하얀 순결을 지키며 수도사처럼 홀로 살면서 성자의 단계까지 이르고 싶어 하는 데 비해 육체로는 탕아처럼 온갖 음란한 욕망으로 시달리고 있는 나의 참담한 갈등을 풀어주었다. 한 여인과 순수한 교제를 가지면서, 또한 졸업과 동시에 결혼 하면서, 그리고 거의 30년의 세월을 세 자녀와 함께 가정을 꾸미어 가면서 위의 일본 철학자의 교훈은 미숙(未熟)에서 생겨진 궤변에 불과하고, '워치만-니'의 성서적 해석이 얼마나 정확하게 성과 결혼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의 한 장면 ⓒ 씨네2000
다만 독신은 타고난 은사를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전 7장)는 것을 아울러 성서에서 터득하게 된 것이다. 다만 하나님이 허락한 축복된 성(性)과 음란의 범주에 들어가는 그 경계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하고 부부가 되어 성관계를 맺는 것은 축복이나 자기의 짝 이외에 이성(異性)에게 음욕을 품을 때, 그것은 죄가 되는 것이요, 더욱이나 롬 1장 27절에 있는 대로 성적인 축복을 역리로 이용하여 동성적인 성생활은 상당한 보응을 받는 다는 교훈이다.

너, 젊은 크리스천들이여! 다시 당부하노니, 반라(半裸)의 보디발의 음란한 아내의 노골적인 붉은 유혹이 도처에서 너의 겉옷을 잡는다 할지라도 요셉처럼 감옥에 투옥되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가는 막대한 손해를 각오하고 겉옷을 던지고 도망쳐서라도 너의 하얀 순결을 사수하라. 그리고 어느 날, 너의 앞에 너처럼 싸워 순결을 지켜온 여인에게 너의 순결을 결혼 선물로 주라. 그때는 하늘의 축복이 비둘기처럼 너의 결혼식과 가정과 자녀들 위에 임하는 것을 목도할 것이다. 나는 내 나름의 참담한 갈등의 20대를 시신(屍身)처럼 30대 초반의 세월 속에 묻어두고 다음과 같은 시(詩)를 기념비처럼 남긴 적이 있었다.

<아이는 동무들과 놀이를 통해 인생을 배우고/ 젊은이는 사랑을 통해 인생의 문을 열며/ 부부는 서로의 숨은 상처를 매만지며/ 인생의 깊숙한 우물에서 아픔을 길어 올린다./ 이제 부모 된 이들은 자식을 통해서 자신의 잊었던 날들을 다시 복습한다./ 사랑을 시작한 젊은이는 이제 방황의 길을 떠난다./ 기다리고, 화를 내고, 조바심치며, 심한 고독 속에서 비를 맞으며 배회하고 밤새도록 쓴 연서를 꾸겨 휴지통에 던지고, 헤어지기를 결심한다./ 어른들은 사랑을 시작한 젊은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망각증 환자다.>

<사랑의 심한 병은 남녀가 서로의 사랑과 갈등이 얼룩진 새로운 아이를 낳고야 치유된다./ 그 많은 연가(戀歌)와 고백과 포옹과 안타까움, 분노와 갈등, 헤어지려는 결심과 다시 그녀의 문 앞에 서있는 그 비열함이 그 아이의 얼굴 위에 순진스럽게 떠오를 때, 이상하게 병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진정한 사랑으로 아파하던 이는 그 모든 것 위에 새로운 환희를 건져내지만/ 장난기로 불장난을 했던 이는 그 모든 것을 무서워 얼굴을 가린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아이들이 성장하여 그 사랑의 열병을 앓을 때, 더 큰 아픔으로 부모는 젊은 날의 상처가 재발되는 것을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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