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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젊은 날의 노래들
[젊은 크리스천들에게 보내는 엽서 ③] 철학적 탕아기 그 끝은 '낮은 자에 대한 무궁한 사랑'
2008년 01월 09일 (수) 13:09:10 김태복 발행인 hipc6012@cry.or.kr

남독(濫讀)의 계절

   
▲ ⓒ http://www.bellarmineprep.org
나의 20대는 한마디로 불덩이었다. 무엇인가 몰두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때였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는 때부터 가장 큰 목표는 그 대학이 소장(所藏)하고 있는 교양서적은 모두 독파하겠다는 대단한 욕심이었다.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지방대학에 다니게 되었다는 심한 열등의식에 대한 어떤 시위행위와 같은 태도였다. 입학식을 마치고 나는 곧장 도서관으로 가서 열람카드를 뒤적이며 독서계획을 수립했고 그 다음날부터 무서운 강행을 시작했다. 나는 그 두껍고 난해한 책들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서도 오직 목표를 하나씩 달성하고 있다는 성취감만으로도 도서관직원이 쫓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어느 때는 진도가 너무 늦음에 성급한 나머지 껑충껑충 뛰어가면서 남독을 즐기고 있었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내가 전공하고 있는 농학(農學)을 강의 받는 동안에도 강의실 뒷좌석에 앉아서 칸트나 헤겔의 책들을 붙들고 낑낑대고 있었고 그것이 내게는 왜나 대견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상당히 많은 책들을 남독하고 난 뒤에 얻은 것은 혼란이었고 산만한 의식구조를 가진 아웃사이더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독서의 목적이 순전히 나의 저 어두운 삶이 가져다주는 의식의 암영(暗影)에서 도피해보겠다는 생각에서거나 아니면 한 가닥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몸부림이 가져다준 쓴 열매인지 모른다.

정신적인 탕아의 계절

대학 2학년 봄, 그해는 3월 말경임에도 잔설(殘雪)이 흩날리는 때에 일단의 대학생들 틈에 끼어 나는 학보병(學步兵)이라는 명목 하에 논산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군대에 입대했고 1년 반짜리 복무기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지독한 훈련을 받았고 최전방에 배치를 받았다, 그 참담한 날들 속에서 나는 전쟁의 악취를 맡았고 극한 상황 속에서 노출되는 저 추악한 인간의 저열한 본능을 보면서 깊은 혐오감으로 치를 떨었다. 병사들은 추잡한 섹스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었고, 그 부대가 주둔하는 마을의 여인들을 성적으로 범하는 것을 무슨 무용담이나 되듯이 떠들고 있었다.

그들은 부대 주변의 밭들과, 혹은 닭장을 뒤적이며 점령군처럼 곡물과 가축을 훔쳐 먹으며, 이를 드러내고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본능에만 충실한 짐승 그대로의 모습을 닳고 있었다. 그래도 진지한 시간이 있다면 술에 만취되어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고향노래 속에 깃들어 있었다. 오직 경건한 신앙 속에서만 성장해 온 나의 순진함은 그들의 욕지거리와 음담패설, 기고만장한 난행(亂行) 속에서 짓밟혀 있었고, 대신 굉장한 분노가 누구인가를 향해 잉태하고 있었다. 그 분노는 무엇인가를 쓰게 만들었고 그것이 내게는 최초의 습작(習作)이 되기 시작했다.

제대하고 나서 나는 어느 극장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3일마다 새로운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그 영화들 속에 등장하는 금발의 여인들은 반라(半裸)의 몸짓으로 나의 정신세계에 무단으로 들어와 더욱 어둡고 붉게 더럽히기 시작했다. 나는 교회에 가서는 모범적인 신자였고, 교회 밖에서는 끝없는 추잡한 생각으로 어지러운 밤을 헤매는 위선자의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갈등과 분노에서 탈출하기 위해 한 여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글을 쓰고도 찢어버리고, 쓰고는 다시 집어던지며 어둡고 축축한 밤을 뜬눈으로 밝히고는 했다.

그러한 내게 교회 강단에서 외치는 목회자와 설교는 아무 감동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알 수 없는 반감과 짜증으로 성가대석 귀퉁이에 앉아 온갖 낙서로 설교시간을 메우고 있기 일쑤였다. 나는 여기저기에 원고를 투고했고 운 좋게도 조그만 기독교 잡지사와 대구의 어느 대학교로부터 당선작의 통지를 받기도 했다. 그때 나는 이 정신적인 탕아의 방황과 열등의식의 미로(迷路)에서 구제되는 느낌에 어떤 기쁨을 맛보기 시작했다. 문학은 나의 구원의 문이었다.

조국을 향해 눈뜨고 있는가?

그 즈음에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소도시를 중심으로 한 어느 단체에 가입하고 있었다. 그 멤버들은 모두가 기독교인이었고 내 미숙한 문학의 눈으로 볼 때, 가관스러울 정도로 이상(理想)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들 속에 깊이 몰입하게 된 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열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은 우리 젊은이들을 꽤나 분노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이 우리들의 열기를 더 불태우게 하고 있었다. 나는 차츰 그 단체의 열기에 휘말리면서 밤을 꼬박 새우며 토론하게 되고 우리가 그 불의한 사회를 개조하고야 말겠다는 어떤 사명감으로 우리의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우리는 기고만장했고, 수도승처럼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 소도시의 기독교의 어른들은 이 ‘무서운 아이들’을 보며 우려했지만 우리는 아랑곳 하지 않고 모여서 고함치고 기도하고 토론으로 밤 을 지새우기를 다반사로 했다. 거기서 내가 눈뜬 것은 바로 조국(祖國)이었다. 조국에 대해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사명감이었다. 또한 세계 속에 한국을 볼 수 있었고, 한국교회의 좌표를 그릴 수 있었다. 그것은 문학 이상의 흥분을 내게 심어주었고, 동시에 문학에 대한 갈망을 약화시키게 된 동기이기도 했다.

신(神)과 죽음에 대한 방황

대학 4년 때, 3년 연상이던 형이 서울에서 교사직을 하던 중 연탄가스로 숨졌다는 비보는 우리 가정의 큰 풍랑을 몰고 왔다. 나는 그 풍랑 속에서 많은 날을 울었다. 나는 기고만장하던 위치에서 무너져 내렸고 깊고 깊은 회의(懷疑)의 절벽에서 저 어둑한 골짜기를 응시하며 죽음의 망령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죽음 너머의 세계는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세계를 이해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자 나는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신학교 채플과 침침한 기숙사 방과 독서실, 혹은 숲을 헤매며 어두운 사색을 했고 때로 항변이 담긴 기도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다메섹 도상에서 깨어졌고 나를 부르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나는 떨면서 나를 부르신 분께 나의 생(生)을 드리기로 약속했다. 그것은 문학에서 주던 창조적인 기쁨이나 우리의 그룹에서 주는 이념이 주는 희열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기쁨이었다.

상록수의 노래

나는 신학대학을 다니며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을 달려야 하는 거리에, 전기가 없는 산골교회의 교육전도사로 부임했다. 그때는 60년대 후반이라 아무런 교육혜택을 받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많았다. 내게 주어진 사역은 토요일 오후부터 월요일까지 청소년회(일명:상록회), 유년교회학교, 성가대, 저녁설교, 월요일은 심방하는 것이었고, 방학 동안은 야학(夜學)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일들은 오랫동안 막연히 상록수의 꿈을 꾸어왔던 내게는 큰 보람을 가슴에 채워주고 있었다.

그 산골의 골짜기와 계곡, 냇물은 너무나 맑고 아름다웠다. 나는 그 숲길을 산책하며 한국과 한국교회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고, 어느 날 눈에 비늘이 벗겨지듯 개안(開眼)이 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한국 교회에 대한 비전이었다. 나의 글들은 이미 문학적인 내용에서 떠나 있었다. 그에 따라 나의 붓들은 한국교회라는 새로운 지평을 향해 어설프나마 그리기 시작했다. 젊은 신학도, 그리고 신학대학 신문의 편집장의 눈에 비치는 한국교회는 너무나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었다.

신학을 연구 할수록, 성경을 깊이 읽어 갈수록 한국교회의 병적이고 위선적인 요소들이 내 가슴에 새로운 분노를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그 산골에서 때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여름날의 모습이나, 하얀 눈이 덮인 천마산 산정을 보면서 책 한 권을 써낼 만큼 많은 아픔들을 한국교회와 한국에 대해 앓고 있었다. 바로 그런 곤고한 때에 하나님은 독처를 하는 아담을 위로하셔서 반려자를 허락하신 것처럼, 28세 때 그녀를 만나게 하셨다. 그녀는 고향교회에서 함께 일했고 대학은 3년 후배였는데,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대학학보에 실린 그녀의 글 때문이었다.

그 글 속에서 그녀는 한국의 ‘달가스’가 되고 싶다는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달가스는 농촌을 위해 생을 바친 이였다. 내가 고향교회를 떠나 산골교회 교육전도사로 부임한 후 늦겨울이 느리게 지나가고 있는 철로 길에서 우리는 우연히 만났고, 거기서 우리는 농촌과 한국과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의기투합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 우리는 농촌과 철학과 신학 그리고 한국에 대한 뜨거움을 담은 편지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틈바구니 속으로 서로가 필요한 대상임을 느끼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편지는 어느새 연가(戀歌)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3년 후에 우리는 각각 학교를 졸업하면서 결혼했다. 우리는 그 아름다운 계곡에 보이는 가난한 사택에 살면서 상록수의 꿈을 노래하며 목회를 했고, 중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재건 학교를 운영하며 우리 부부는 열심히 가르쳤고 때로는 저들의 땅에서 김을 매어주기도 하는 등 가난한 농촌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내게 준 동역자요, 동지이며 반려자였다.

근대화의 폭풍 속에서

   
▲ 달가스(Enriko Mylius Dalgas, 1828 ~ 1894)는 덴마크의 군인출신 사회 부흥 운동가이다. 히스지대의 개간작업을 착수하여 황무지에 나무심기를 거듭한 끝에 땅을 옥토로 바꾸어 놓았고 이 덕에 국민들도 실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아름다운 농촌을 하나님의 낙원(樂園)을 만들어 보겠다는 이상에 불타고 있었다. 청소년을 신앙과 지성적으로 양육하여 장래 이 마을에 지도자로 세울 것이며, 덴마크의 농촌처럼 기름진 곳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로 부부는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군인출신들의 정치가들은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노래를 군가처럼 부르기를 강요하면서 경제적인 정책을 탱크처럼 밀어붙이고 있었다. 엄청난 차관을 들여다가 공장을 세우고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청년들은 월남전에 참전한 대가로 벌어온 달러로 도처에 건설의 깃발을 높이 세우고 있었다.

그에 따라 엄청난 인력이 필요하므로 농촌의 청소년들이 대도시로 대량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농촌의 기둥으로 성장되어 가던 청소년들이 가출하듯 고개를 넘어 도시로 떠나기 시작했고 1년 사이에 교회는 노인만 남은 느낌이었다. 근대화의 폭풍 속에서 농촌은 황폐되어 버렸다. 나는 그 황폐한 터 위에 심한 갈등으로 서 있었다. 비록 박봉일지라도, 병원조차 없는 곳에서라도 우리 부부의 보람은 청소년들에 대한 기대로 보람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들이 직공으로, 식모로, 버스 차장으로 혹은 뒷골목의 인생으로 탕자처럼 떠나 버린 후 농촌은 삭막함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 늙은 교회를 위해 내 젊음을 계속 불태울 것인가, 아니면 더 넓은 어장을 향해 나도 저 고개를 넘어갈 것인가 하는 갈등이었다. 그러한 갈등 속에서 4, 5년을 버티다가 눈물을 흘리며 만류하는 교우들을 뒤에 두고 나도 그 산골을 도망치듯 떠나온 기억이 지금도 아픔처럼 느끼고 있다. 나의 20대는 한 마디로 철부지 같은 불덩이었고, 심한 열등의식이 가져다준 방황과 저항들로 얼룩졌고, 때로는 속이 빤히 보이는 오만을 문신처럼 노출시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저 어두운 실패의 늪으로부터 나를 건져주시고 숱한 나의 얼룩진 상처들을 치유하셨다.

나의 20대는 스타들처럼 번쩍이는 업적은 아무 것도 없었을지라도 그때는 순수함으로 빛나고 있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목회 종반전에 이른 지금에는 노련해 있고 안정이 있어 보일지 모르나 저 20대의 순수에 비하면 엄청난 욕심과 과시, 이기심, 나태함으로 속화되어 있음을 부끄럽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주여! 저희 부부에게 다시금 저 20대의 순수로 빛나게 도와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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