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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7강 103편 여호와를 송축하라
2022년 07월 29일 (금) 17:33:40 조무웅 강도사 www.cry.or.kr
살아가면서 아 나는 참 행복해 이런 느낌을 받을 때가 좀 있지요. 어떤 때이어요
저는 맛있는 것 먹을 때 맞아요
저는 피곤하여 잠자리 들 때 아니면 따뜻한 물에 샤워할 때
저는 예배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
저는 자녀가 아주 평범하게 잘 자라고 일상생활 잘 하면서 건강하게 자랄 때 행복하지요.
 
보면 사람들이 절망하고 낙심한 것을 보면 사실 인생의 큰 문제 때문에 그러지 않거든요 사실 아주 어려운 인생의 고비를 만나면 견딜 수 있는 힘이 와요 이상하게 견디어져요.
 
그런데 뜻하지 않았는데 자꾸 사소한 문제 때문에 우리의 삶이 무너질 때도 있고 그런데 아주 지쳐 있고 힘들었는데 정말 아까 이야기한 사소한 것들이 나의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고 또 절망의 자리에서 희망으로 올라오게 해 주고 그러지요
 
그래서 나는 늘 주장하는 게 일상의 자리를 떠나서 우리가 거룩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희노오락 애오욕의 7가지 정서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과제 같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복 이야기를 했지요 어떤 사람은 그 가운데 하나가 이가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것 없고 그러니까 자기 수명대로 사는 것 또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부를 누리는 것 그 다음에 사람들에게 귀하게 여김을 받는것 이런 것들 그 다음에 덕스러운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 그것도 굉장히 중요하지요 또 천수를 다 누리고 평안하게 세상을 떠나는 것 이런 것들이 이제 복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굉장한 것이 없거든요. 그런데 성서가 이야기 하고 있는 복은 조금 다를 때가 있지요 우리가 특별히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 수훈에 보면 복이 있다 원의 순서로 보면 그렇게 되거든요. 복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이렇게 말하지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과 다른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성경도 똑 같은 복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더 깊은 복은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는 것 내가 사랑의 통로가 되어서 누군가에게 하늘의 복을 나르는 것이 되는 것 이런 것이 더 큰 복이지요.
 
우리 많은 성도들이 기도할 때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청할 때가 있지요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청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것은 그 신앙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되겠다이지요. 더 깊은 복의 세계로 나갔으면 좋겠다
 
우리가 함께 공부하려는 시편이 진자 복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일깨워 주거든요
함께 읽어 볼까요 시편 103편입니다.
 
시편은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묵독하는 것이 아니라 낭송해야 맛이 난다고 이야기를 했지요. 사실은 노래로 불리어 져야 더 좋은데 노래는 많이 잊혀 졌기에 낭송이라도 해 봅니다.
 
소리내어 낭송하는 순간 그 소리를 내가 듣게 되지요. 눈으로만 볼 때는 내가 눈만 사용하게 되는데 머리하고 내가 낭송하게 될 때는 눈으로 보고 소리를 내고 그것을 귀로 듣지요. 그것을 그 과정을 통해서 나에게 세겨집니다.
 
낭송이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눈은 하나의 지각을 사용하지만 낭송하는 것은 여러 가지 지각을 사용하지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보여져요 그런데 이 시는 오늘 우리가 읽은 시는 따뜻하지요 아름답고 그래서 분류하자면 찬양시 혹은 감사시로 분류를 하고 있습니다. 둘다 가능해요.
 
22절까지지요. 상식인데요6. 히브리 알파벳이 22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을 읽다 보면 22자로 되어 있는 시편이 있어요 혹은 22절도 되어 있는 8개의 시들이 묶여져 있는 시도 나옵니다. 시편 119편인 같은 것인데요 의도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서에 보면 22절로 되어 있는 장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대단히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것은 그런 구조로 구조화 되어 있다
 
어떤 것은 히브리 알파벳 순서에 따라서 첫 글자를 그렇게 쓰는 경우도 있고 꼭 그 순서를 따르지 않는 글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것은 22절로 이렇게 되어 있는 시다는 것을 알 수 있고요.
 
첫 구절부터 시인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 그렇게 말하고 있는 대 내 영혼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것은 자기의 전 인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어떻게 송축하지요 나는 그런 송축이 때때로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모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 그런 송축이 의미가 있는 데 사는 것은 하나님 속상하게 해 드리면서 하나님 최고여요 하면 굉장히 공허하게 느껴지지요.
 
제가 시화해서 이야기 했지만 이런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송축한다고 하는 여기에 번역되어 있는 그 단어는 무릎을 꿇고 경배하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무릎을 꿇는 것은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시인이 했던 이야기 인상적이어요.
무릎을 안으로 굽으러 진 까닭이 무엇인지 아느냐
첫째는 절대적인 권위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알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은 자기보다 큰 권위 앞에 무릎을 꿇을수 있을 때 참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옛날에 우리가 스승님 앞에서 또 아버지 어머니 앞에 앉을 때는 무릎 꿇고 앉었셨지요. 그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영혼을 살려주는 일이기도 했어요 그런 것이 내가 힘이 부족해 가지고 마음에도 없이 무릎을 꿇는다면 내 속에는 굴욕감만 남겠지요. 그것은 무릎을 꿇면 안 되어요요 굴복하면 안 되어요.
 
사람이 정말 큰 정신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보다 큰 정신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누가 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고기잡이 이적을 경험한 다음에 뭍으로 올라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어요.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것은 큰 정신 앞에 자기의 작음을 절감합니다.
 
자기의 작음을 적응할 때 사람은 무릎을 꿇을 수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스승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려고 할 때 제자다 늘 스승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으면 크게 배울 수 없습니다.
 
선생님 저것 아닌데 저렇게 이야기 하시네 요즈음은 대학에서 가르치는 제자들 이야기가 아주 속상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야기 하면 인터넷 검색을 해 가지고 선생님 아닌데요 그것은 배움의 자세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가 진정으로 배우기 위해서는 스승을 귀히 여길 수 있어야 해요. 무릎을 꿇을 수 있어야 해요.
 
무릎이 앞으로 꿇는 두 번째 이유가 있어요 그것이 무엇일까요.
불의한 것을 보거든 떨쳐 일어나라 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70년대 대학에 다니면서 그런 노래 많이 불렀습니다. 무릎을 꿇고 사느니 보다 서서 죽기를 원하노라 노래를 불렀어요
 
이것은 멕시코 어느 시인의 시구 가운데 하나인데 우리는 무릎을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 이렇게 장엄했던 것이어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여호와를 송축한다는 단어는 무릎을 꿇고 경배하다 그런 뜻입니다. 나의 전심을 다해서 그 분의 권위 앞에 나를 내려놓는다 하는 뜻이지요
 
그리고 내 속에 있는 모든 것들아 주님을 찬양하라고 하는데 여러분 내 속에 있는 것들 무엇이어요. 내 속에 심장도 있고 간도 있고 폐도 있고 그런데 십이지장도 있다교. 생물학적 지혜가 아주 뛰어나요
 
생각 영혼 모든 것들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옛날 사람들은 인간의 장기속에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다고 생각했어요 신장에 담겨 있는 마음이 있고 심장에 담겨 있는 마음도 있고 창자에 담겨 있는 마음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 속에 있는 장기들 그 모든 것을 찬양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내 생각 내가 가지고 의지 내가 가지고 있는 지성 감정 의지 이 모든 것들을 총체적으로 불러내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찬양할 때 입술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어요 생각도 의지도 감정도 그분에게 온전히 지향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왜 자기 속에 하나님 찬양하는 자리에 소환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분의 은혜가 크기 때문에 그분으로 겪은 은혜가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은혜를 오늘 시편에 이야기 하고 있어요
3절 “그가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내 모든 병을 고치시며” 그렇게 말하지요
여러분 죄악을 사했다 죄악을 사하여 주시고 그 다음에 병을 치유해 주시고
그 다음에 4절 내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그 다음에 인자와 긍휼로 관 씌우시고
그 다음에 5절 좋은 것으로 내 소원을 만족하시고 이렇게 이야기 되고 있지요
 
자 죄악을 사하였다고 하는 것 죄를 사해 주었다 죄를 없는 것으로 쳐 주시는 것이지요. 죄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으로 쳐주는 것이지요. 죄악을 우리에게 사해 주셨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제가 깊이 이야기 않더라고 우리들이 알게 되는 데요
 
어떤 신학자가 이야기 했습니다. 인간이 구원 받음의 경험이 무엇이냐 인간이 도대체 구원받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할 때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받아 드려졌어 그것을 내가 느끼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죄라고 하는 것은 무엇한다고 했어요 죄라고 하는 것은 관계를 멀어지게 만듭니까? 가깝게 만듭니까? 죄가 들어오면 멀어지지요.. 그래서 죄라고 하는 것이 소외 시키는 힘이라고 했어요. 멀어지게 하는 것이야 쉽게 이야기 하면 그래서 우리는 죄를 거듭하여 저지를 때면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멀리 있다고 느낍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나 같은 것에 관심이 없을 것이야 이렇게 되지요. 그런데 죄를 사해 주셨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냐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리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품어 안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야 이게 죄에 사함 받은 사람의 경험이야 내가 그 사랑에거 배제되지 않았구나 하고 느끼는 것이지요.
 
여기 치유된다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여러분 병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몸 아픈 것이 다 병이지요. 그런데 그리스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도 그렇습니다마는 그리스 사람들은 병을 무엇으로 보았느냐 하면 균형의 파판으로 보았어요.
 
병이라고 하는 것이 균형이 무너진 상태 무너짐 그래서 이 균형이라고 하는 것이 이소노미아라고 이야기 하는 데 이것이 균형입니다. 평등한 것이어요 이것은 아름다운 상태이지요.
 
그래서 여러분 이런 말 들어보았어요. 호메스타시스(homestasis)라고 하는 데 그것은 우리 몸에 있는 항상성이라고 해요. 추운날 어떻게 해요 세포가 수축되므로 몸속에 있는 열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해서 안에는 유지하는 것이지요.
 
더울 때는 몸속에 있는 물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고 더울 때는 땀구멍을 열고 체내의 열을 배출함으로서 항상성 恒常性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요
 
항상성 恒常性이라고 이야기 할 때 항상 이렇게 말한단 말이어요 늘 그러한 것이지요. 균형 있는 상태라고 하는 것은 저는 恒常性이 있는 상태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균형이 깨지면 무엇이 되느냐 하면 병이 되는 데 그것을 모날키아라고 말 하는데 모날키아는 한쪽의 지배를 뜻해요. 균형을 이루지 않고 한쪽에 치우친 것을 뜻한단 말이어요.
 
병이라고 하는 것은 균형이 무너진 상태를 이야기해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치유해 주신다는 것은 내가 감기 걸렸는데 낫게 해 주었다 이것도 치유이지만 내 삶속에서 무너졌던 균형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치유인 것이지요
 
몸만 나은 것이 아니고 내 마음속에 무너졌던 균형을 되찾게 해 주심이 치유다는 말이지요 이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조각나 있던 나의 마음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어요. 치유가 일어난 것이어요. 회복이 그러니까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내 생명을 속량해 주셨다는 것도 속량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하면 속(贖)자를 이렇게 쓰거든요 여기에 보면 조개 패(貝)자가 들어 있어요 이것은 돈입니다. 옛날에 조개를 돈으로 사용하지 않아요 속량이라고 하는 것은 값을 지불하고 자유롭게 한 것이야 양민이 되게 한 것이야
 
우리가 우리 죄를 속량 받았다는 것은 내가 갚을 수 없는 빚을 누군가가 대신 갚아 줌으로 내가 자유케 될 것을 뜻해요. 하나님이 결국 내 생명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을 값을 주고 자유케해 주셨어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어요 지금
 
그리고는 그런 생명을 죄악을 사하시고 병을 치유해 주시고 생명을 속량해 주시고 그냥 두신 것이 아니라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어 주셨어 인자함이라고 하는 것은 긍휼도 마찬가지이지만 무엇이지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어요.
 
당신의 언약을 맺은 백성들과 더불어 그 언약을 지켜 가시는 사랑을 언약이라고 이야기 하지요 그 사랑 지금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받았던 내 삶이 어떻게 되었어요. 만족하지요
 
이 과정이 일목요연하지요 시인이 이 복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나 이런 복을 받았어
1절과 2절에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이렇게 말하는 것 당연해요 저 경험이 있다고 한다면
 
5절까지 그런 이야기로 되었고요
결국 그렇게 되었을 때 이런 삶을 이루게 되었을 때 내 청춘이 무엇으로 되었다고요.
5절 독수리 독수리 멋있지 않아요 날개를 펴면 한 3미터 되는 녀석도 있더라고요.
 
지금 보니까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들이 죄 병 내 생명이 무엇인가 위축되어 있는 상태 이런 것들인데 하나님이 오셔서 이 모든 것들을 해결해 주시고 잃어버렸던 내 마음이 균형이 되 찾아지고 내 속에 항상성이 있어 절망의 순간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금방 절망 딛고 내 마음에 평정을 이루고 살 수 있고 또 아주 슬픈일을 만나도 잠간 흔들릴 수 있지만 금방 평형을 되찾고 이게 건강한 상태여요. 그럴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의 감사 노래를 지금 부르고 있는 것이어요
6절부터 보면 공동체의 감사 이야기가 나오는 대요
이것이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말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5절까지는 시인 개인의 이야기다면 6절부터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이야기를 보여 주고 있어요
 
그 하나님의 은총이 개인의 경우에 이러했으나 공동체의 경우에 그가 기억하고 있는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시는데 6절 위로로 다스리는 것과 공의로움을 다스리시시는 것과 또 하나는 억압당하는 자를 억압을 없에 주시는 것이어요.
 
억압이라고 하는 것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억압을 가하는 사람이 있고 또 억압을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갑과 을이지요 갑이 있고 을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 억압을 없에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억압을 가하는 갑을 없에는 방법이 있어요
하나님 바로를 치셨어 애굽의 왕인 바로를 치시기도 합니다.
 
억압을 없에는 또 하나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억압당하는 자를 없에는 것이야 억압당하는 사람이 없으면 억압을 한 사람도 없어집니다. 이것이 해방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짓 눌려 있었어요 그러니까 끊임 없이 억압이라는 것이 정치적인 억압만이 아니지요. 내가 오늘 나오는 데도 내 헨드벡 너무 초라해 내 친구에 비하여 이것도 억압이야 내가 짓눌린 상태 아닙니까?
 
헨드백 가지고 이야기 했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우리를 상당 부분 억압하고 있거든요. 사람이 살려면 이 정도의 집에서 살아야 돼 이런 것들이 우리를 억압하고 있어요 그 세상 전체를 무찌를 수는 없어
 
어떻게 나는 내가 노 나는 그렇게 안 살걱이야 나는 이렇게 해도 행복해 행복을 구성하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하면 그들의 영향력이 내게서 사라져 이것이 무엇이냐 억압당하는 자가 없어지는 것이어요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그가 생각하는 다른 행복이 내게 있어야 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내면화 하는 과정 아니겠어요
 
그런데 속 상한 것은 많은 신자들이 속상한 것은 많은 신자들이 자기 속에 이러한 내면의 든든함을 가지고 세상의 허망함에 대해서 노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한데 그렇지 못하고 세상적 가치관을 추구하기 위해서 전전 긍긍하여 맨날 주여 주시옵소서 이러고 산다 이것이지요 불행한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렇게 억압하는 자를 없에시기도 하고 또 내적으로는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더 큰 질서속에 자기를 묶어 둠으로서 억압당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는 자유인이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 주시는 이런 두 가지 공의로 역사를 주관하시고 그리고 억압당하는 자를 해방해 주시는 것 그렇지요
 
여기에서 억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셨다고 이야기 하는데 이것이 억압당한 자들의 권리를 보호해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길입니다.
 
7절에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그의 행위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의 길이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길이기도 하고 모세에게 하나님의 길을 일러 주신 것이어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일어 주신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일일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프로그램화 한 것을 주실 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길을 아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길을 따라 사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결국은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그의 행사를 알려 주셧다 그분이 어떤 일을 하셧는지 알려 주셨다 하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나옵니다. 성경에 나오는 전형적인 고백이지요.
8절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하나님이 이것이 성경에서 전형적인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어떠합니까?
9절 자주 꾸짖지 않으신다. 여러분 아이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무엇이러요 잔소리 어른도 듣기 싫어해요 한번만 말하면 되는 데 또 말하고 또 말하지요
 
그런데 그것은 정말 노파심인데 제가 알아 들었을까 다 알아 듣거든요. 그리고 엄중하게 말하고 그리고 놔두어야 해요 그것을 내면화 할 수 있도록 워낙 어긋난 녀석들이 있지요. 고집된 당나귀처럼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간혹 또 꾸짖어야 하고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도 차별적 언어가 좁살 영감님처럼 날마다 야단치지는 않으신다
 
9절 노를 영원히 품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이 스스로 노예가 되는 것은 무엇이냐 늘 노를 품고 사는 것이지요 자꾸 풀어 버릴 수 있어야 되어요
 
10절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않으신다 죄악을 따라 갚지 않으신다 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그 다음에 11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을 크심이로다 하고 말합니다.
 
그 인자하심이 크심을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 크심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은유적 표현 하고 있어요 무엇과 같이 하늘에서 땅이 먼것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너 아빠 사랑해 엄마 사랑해 얼만큼 하면 아이들은 이만큼 그러면 어떻습닙까? 집짓 못 마땅하게 겨우 그만큼 그러면 아이는 이제 생각한 것이어요. 저 인간이 얼만큼 해야 만족하는 가 아이들 머릿속에 하다가 아이들이 은유를 사용한 것이어요. 하늘만큼 땅만큼 아이가 생각하는 것도 똑 같아 시인도 똑 같아 하나님의 인자하심 그만큼이어요 이 크신 사랑에서 제외가 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은 공의를 베푸시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의 정의 공의보다 더 큰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이것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 규정이 더 크다고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앞에 설 수 있겠어요.
 
하나님의 공의로움이 크시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것은 인자하심이어요 때때로 우리를 때리시지만 어루만지시는 하나님 이것입니다.
 
12절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셧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의 죄과를 이제 멀리 옮기셨다고 이야기 하는데 여러분 인간의 죄과라고 하는 게 죄의 열매이지요.
 
죄의 열매라고 하는 게 잘 와 닿지가 않아요 내게 내가 죄를 지었어 죄의 열매 이것 벌 받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 해 볼까요 죄과가 무엇인지 여러분 내가 부모인데 형편없는 인생을 살았어 내가 아주 사람들에게 몰인정하게 대하고 그리고 아주 이기적이고 못되게 살았습니다.
 
내 자식이 그런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것이야 그러니까 애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아버지처럼 안 살 것이야 나중에 보면 아이가 제 아버지를 카피해 기가 막히지요 시어머니하고 며느리하 사이가 그렇지 않아요
 
나는 나중에 며느리를 보면 어머니처럼 안 살 것이야 똑 같이 틀림없이 더해요 이것 참 묘해요 이것이 무엇이냐 죄의 영향력입니다. 그래서 내가 잘 살아야 하는 까닭이 나 개인에게도 중요하지만 나의 사는 것이 주변에 영향력을 미쳐요
 
여러분 어느 사회학자의 노트에 나온 필기해 놓은 것을 제가 보았는데요 간단하게 필기를 해 놓았어요 미치기까지는 3대가 걸린다 그렇게 말해요 어떤 사람이 정신적으로 굉장히 어려워지는 것은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 가계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어요 이것이 무엇이어요 죄과 그렇지요 우리는 모두 그 죄과 속에 있는지 모릅니다.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은혜는 결국 어떤 일을 하느냐 하면 죄과에 따라서 우리가 그 영향력 아래 살 수 밖에 없게 되었는 데 은혜가 우리 속에 들어오는 순간 죄과를 동이 서에서 먼 것 처럼 옮겨 주셨다 하고 이야기 합니다.
 
죄의 영향력이 내 삶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 주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이어요 그렇지요 죄의 영향력보다 더 큰 영향력이 내 속에 유입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어요 이것이 은총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랑은
13절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기는 것처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셨다
하나님은 왜 긍휼히 여기시느냐 보았더니
14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시니이다 하고 말합니다.
 
체질을 아신다 어떤 체질이어요. 소음인도 있고 태양인도 있고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나는 물만 먹어도 살찌는 체질이야 이야기 하지요 그래서 정말 살찌는 사람들의 고민이 있지요. 정말 체질이 있어요.
 
그런 체질이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우리가 내성적 외성적하고 이야기 하는 데 그러니까 그것이 안으로냐 밖으로냐 하는 것인데 내성적이라는 말이 우리 문화속에서 가지고 있는 약간 부정적 뜻을 가지고 있어요
 
내성적이야 성격적으로 위축되어 있다고 보입니다. 어떤 사람을 그렇게 평가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냐 하면 내향적 외향적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것은 그냥 그 사람의 성질 특질일 뿐이지 내향적인 것이 더 좋은 것도 없고 외향적인 것이 더 좋은 것도 아니어요
 
우리에게 주어진 본 바닥이 있지요. 그렇게 봐야 되는 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체질이라고 하는 말을 영어로 보니까 무엇이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프레임 그러니까 그분이 우리 골조를 아셔 우리 뼈대를 아셔 우리 틀을 아셔 그 이야기는 지금 무엇을 이야기할까요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유한한지 그것을 아시는 것이지 이것을 체질이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체질을 아실 뿐 아니라 우리가 먼지 뿐임을 아셨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먼지와 같이 금방 흙으로 돌아가니까 그래서 긍휼히 여기신답니다. 비틀거리도 하고 죄 짓기도 하고 아니구 불쌍한 것 하고 그리고 긍휼히 여겨주신다는 것이어요
 
그래서 이 시인이 고백하는 것이어요. 그 하나님의 절대성 앞에서 하나님의 영원성 앞에서 보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과 같습니까?
 
15절 그 날이 풀과 같고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절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어떻게 보면 유한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분은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무덤 명상을 할 필요가 있데요 무덤 명상 그 말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무덤에 묻혀 있는 것을 상상해 보는 것이어요
 
사람들이 와 가지고 무덤 앞에 와서 애도합니다. 참 좋은 분이었는데 아깝게 가셨어 그리고 가족들 슬피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첫 성묘 때도 가족들이 와서 삼오제라고 하는데 첫 성묘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첫 성묘라고 하는 것이어요
 
첫 성묘에 가 가지고는 애통해 하고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서는 안 찾아와 아무도 언제 오느냐하면 명절날 되어야 오고 추석날 되어야 오고 그래요. 그러다가 가는 발걸음이 점점 뜸해지고 잊혀지는 것이야 나에 대한 기억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어요.
 
이 기억들 보면 허망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자유가 우리에게 오기도 합니다.
내 삶이라는 그래 내 삶이라는 것이 잊혀질 수 사람들이 인정하고 사는 것이어요. 그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인생이 어려워지거든요.
 
무덤 명상 해 보면 오늘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그렇게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어 너무 집착 안해도 되는 것이지요.
 
인생이 들 풀과 같다고 이야기 하는데 유다 광야에 부는 바람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바람이 여름철에 가뭄이 다가오교 그리고 그 바람이 불이 땅이 쩍쩍 갈라집니다. 그것을 이야기 합니다. 바람이 불면 다 말라서 시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인생이다.
 
그럼에도 불고
17절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이렇게 유한하기 이를데 없지만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다
 
누구에게 18절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명령하신 법도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다시 이야기 합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데 미란씨 표정이 쓸쓸해 졌어요 유한해 인간의 삶이 유한해 이 유한함에 대한 자각은 나로 하여금 무엇이냐 하면 집착을 좀 버리게 되지요. 이것을 깨달을 때 그러나 인간의 삶은 풀과 같지만 그 영화로움이 들에 피는 꽃과 같지만 그러나 바람이 불면 사라질 것에 지나지 같지만 그렇지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고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사람은 유한함 속에 살고 있지만 이미 영원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야
 
내 삶이 영혼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냐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지않고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에 걸고 살게 될 때 영혼을 누리고 사는 것이어요 우리가 믿음의 자리에 초대를 받은 까닭은 거기에 있다는 것이어요
 
이것을 알고 나니까
20절부터 보면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이제는 나와 공동체만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도 천사들도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군들도 뿐만 아닙니다.
 
22절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는 너희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피조물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 하나님을 찬미하자 이것이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만 그 찬미를 통하여 우리가 들어내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심입니다.
 
인간의 가장 보람된 삶은 무엇이냐 자기의 유한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여러분 우리 속에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영원할 것입니다.
 
/푸른초장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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