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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종교의 구원의 문제와 현대사회에서의 그리스도 신앙
 작성자 : 김종희 목사  2009-10-30 00:14:33   조회: 4851   
이 글은 지난 9월 새문안교회에서 있었던 학술강좌에서 공모 수상작으로 신대원 1학년 양수교회 전도사가 발표한 글입니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해서 이미 신학교에서도 연구가 되어 있고 신학생들이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가 되어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해서 깊이 알지도 못하고 부정적인 비판을 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참석했던 한 사람으로 새문안교회 홍보부로부터 자료를 받아 소개합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 46회 언더우드 학술강좌 제1회 기독청년 학술논문 공모 수상작

타종교의 구원의 문제와 현대사회에서의 그리스도 신앙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신학과 1년 이재용(약수교회 전도사)

I. 들어가는 말 - 나의 이야기
II. 오늘의 도전과 상황
III. 성서의 도전과 상황
IV. 타종교에 대한 구원론적 해석
V. 오늘날의 그리스도 신앙과 교회의 선교
VI. 나가는 말 - 나의 이야기
참고 문헌

I. 들어가는 말 - 나의 이야기

논문의 시작을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이 현재종교다원사회의 상황에 놓여있는 한국교회와 신학계가 처한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고려하면, 개인적경험은 도리어 논의의 맥락을 설정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중학교 시절 사춘기와 함께 신앙적 회의와 방황의 시기를 경험했다. 그 중 중요한 요인은 바로 타종교에 관한 것이었다. “과연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은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이 질문을 들고 부모님이나 교회의 선생님 및 교역자들을 찾아가보면, 모두 한결같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강조하였다. 이 교리는 너무나 불합리하였고 필자에게수많은 질문을 낳게 했다. 그러나 들려오던 대답은 항상 말씀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교도권에 대한 순종의 강요였다.
수년간 신앙적 방황의 시기를 보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필자는 신앙의 길로 돌아올 수 있었고, 결국 신학교에 진학하여 목회자 후보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신학의 여러 분야와 주제들 중 단번에 필자의 가슴을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종교다원주의적 신학이었다. 타종교의 구원 대한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관점의 신학들은 필자에게 놀라운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주었고 타종교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고 개방된 태도를 갖게 해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종교다원주의적인 신학관을 가진 이후, 필자는 차츰 복음에 대한 확신이 약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허울 좋은 이유들은 청산유수처럼 말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에게 순교의 정신이 있는가라
는 질문에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구원론의 긴장성을 약화시켜 결국 맹목적인 낙관주의에 빠지게 하였다. 또한 이 종교도 옳고 저 종교도 옳으니, 무분별한 혼합주의로 기독교의 정체성이 혼란스러웠다.
위와 같은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은 오늘날 교회와 신학계가 동시에 앓고 있는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즉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기에는 이 사회가 너무나 큰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적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고, 사회의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를 용인하기에는 복음에 대한 확신과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신학자 몰트만이 말한 정체성과 적절성의 딜레마1)이다. 즉 기독교의 정체성만을 고집할 경우 우리는 사회적인 비난과 불신을 얻게 되어 사회적 적절성을 상실하겠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의 적절성
만을 강조할 경우 우리는 값싼 은혜를 남발하며 십자가의 도와 순교자의 삶과는 거리가 먼 신앙의 상태가 될 것이다. 타종교 속에서의 신앙은 이처럼 시급하고도 중요한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이미 종교다원사회로 진입한 오늘날의 상황을 돌아보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란 무엇이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살펴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본문은 성서의 말씀과 역사적 비평장치 그리고 조직신학적 고찰을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해서 접근하고자 한다.

II. 오늘의 도전과 상황
1974년, 인도에서 35년간 선교사역을 했던 레슬리 뉴비긴은 그의 고향 영국이 선교지 인도보다 더욱 선교가 어려운 지역이 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게 된다. 20세기 중반에 들어 소위 기독교 국가라고 자부하던 서구권의 국가들은 심각한 종교적 변화를 경험한다. 그것은 기독교 중심적 세계관에 근거한 우월적 태도를 포기하고 상대방, 즉 타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제 타종교는 단순한 기독교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이 세계를 발전시켜 가며 인류의 공존과 발전을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협력자로 인식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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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oltmann, Jurgen, 김균진 옮김,『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 기독교 신학의 근거와 비판으로서의 예수의 십자가』
(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 1979.), 1.
2) 한국일,『세계를 품는 선교: 선교 중심 주제』(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4), 210-211

이미 세계는 다종교 시대로 진입하였다. 우리가 다원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말은 이제 상투적인 느낌의 단어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사회가 다원성을 승인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게 여긴다는 의미에서 더욱 그
렇다. 이러한 다원주의적 사회에서는 어떤 무엇을 절대적으로 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절대적인 것은 이미다원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3) 이러한 경향은 종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때문에 오늘날 많은 종교가 배타적인 입장보다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와의 문제에 대하여 단순히 배타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기독교 잡지 신앙세계가 2000년 7월에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타종교에 대한 의식조사를 보면, 목회자들의 50.9%는 타종교에 대하여 “철저하게 배척해야 할 대상”이라고 보았고, “나의 종교와 경쟁관계에 있다”는 항목에는 15%의 목회자들이 답변했다. 즉 한국교회 목회자의 65.5%가 타종교를 배척해야 할 대상 또는 경쟁상대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 아직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의 문제에 직면하는 것을 민감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문제는 단순히 기독교가 타종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인식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기독교인에게 타종교는 기독교의 핵심인 구원론과 관계되어 있다. 즉 타종교인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만약 타종교인이나 불신자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면, 우리는 그들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또는 최근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논의대로 타종교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는가? 어차피 최종적으로 천국에 가서 만나면 되는 일이 아닌가?
종교다원사회 속에서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딜레마의 핵심에는 바로 구원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또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중에는 서로 다른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업무를 보고, 공부를 하고, 생활을 하는 것에는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타종교인 또는 불신자와의 관계 속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바로 구원에 관한 문제이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구원관에 의하면 구원을 받는 것은 내세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영생을 누리는 것이고,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지옥 불에서 영원히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타문화로 인한 그리스도인의 혼란과 문화적 충격은 오늘날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문화관에 반하는 문화양식, 예를 들어 동성애나 자살, 안락사 또는 존엄사, 사이버문화와 주초의 문제 등은 논의의 여지가 있고 협의가 가능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종교 및 불신자의 구원에 대한 문제는 다르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구원관에 비추어 볼 때, 이 문제에는 논의와 협의불가의 영역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전도용 구호는 이러한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종교다원사회에서 구원관을 재구성하는 것은 시급한 일이다. 이미 신학계에서는 구원관에 대하여 배타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 등의 다양한 입장들이 격렬하게 논의를 거듭하고 있다.5) 각각의 입장들은 저마다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바로 정체성과 적절성의 딜레마가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으며 동시에 도치되어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과연 배타주의야말로 기독교복음의 정체성인가? 다원주의는 이 시대에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타종교인들이 기독교의 포용주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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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Newbigin, Lesslie, 홍병룡 옮김,『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IVP, 2007), 16-17.
4) 한국일, 211.
5) 배타주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타종교를 통한 구원의 문제는 불가능
함을 주장한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칼 바르트를 들 수 있다. 포용주의는 칼 라너로 대표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빛이 타종교에도 열려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타종교를 기독교적 구원의 관점에서 포용하고 이해한다. 다원주의는 존 힉이나 폴 니터 등에 의해 대표되는 학설로, 모든 종교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접할 때 과연 감사하게 생각이나 할까? 배타주의와 포용주의 그리고 다원주의 모두는 오늘날에 적절한 입장이 아닌데, 그것은 대화의 가능성 자체가 말소되거나 무시되기 때문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대화란 마땅히 상호존중과 배려가 전제된 상태에서 예의를 갖추어 의사를 교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배타주의적 입장에서는 타종교에 대한 언급 자체가 들어올 길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타종교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대화 상대가 될 수 없다. 오직 유기와 지옥만이 대답이다. 포용주의는 일방적인 선언에 지나지 않는다. 포용주의적 입장에서 타종교는 종교적제국주의의 일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매우 고압적인 자세로서 대화의 바른 자세라고 볼 수 없다. 그리
고 다원주의는 타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점에서 대화 개진의 여지는 있으나,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서나누는 대화는 ‘잡담’에 불과할 수 있다. 즉 무의미한 단순 정보 교환이 될 가능성이 크며, 실제로 종교 간의 대화란 각 종교 간 공통분모를 발견하거나 또는 다름을 확인하는 차원으로 그치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재구성되어야 할 기독교의 구원론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성서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거나 자신의 입장을굳건히 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타종교를 보기 이전에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 성서는 그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성서를 통해 타종교를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은 성서의 일차적 목적이 아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공동체인백성과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따라서 성서의 일차적 청중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할 수 있다.

III. 성서의 도전과 상황

놀랍게도 종교다원사회의 상황이 비단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서의 상황은 이미 충분히 종교다원사회였다. 성서는 결코 폐쇄적인 공동체에게 전수되는 비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시 종교다원사회와 다문화 사회 속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공동체에게 주어졌다.
구약의 상황은 오늘날 종교다원사회 상황에 큰 해안을 제공해준다. 고대로부터 이스라엘은 주변의 패권국가에 의해 좌우되는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적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이는 종교와 문화적 혼합주의의 도전과 위협의 측면 또한 그렇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는 시종일관 혼합주의적인 신앙의 모습을 배격한다.이는 십계명의 제1계명부터가 이미 우상숭배에 대한 금지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면 더욱 분명하다.(출 20:3,신 5:7)
구약의 야훼 신앙은 온전하고도 철저한 신앙과 헌신을 요구한다.6) 그러나 그 확고한 신앙이 과연 타종교를 향한 저주와 매도로 이어지는가? 실제로 이스라엘의 선민의식과 그 역사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살펴볼 때 그것은 이스라엘의 교만의 죄일 뿐 하나님의 구원의 의도는 아니었음을 볼수 있다. 요나서는 분명한 이방인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니느웨 백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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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장영일,『구약신학의 역사적 기초』(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1), 204-208.

의 고유한 종교와 신앙이 그들을 구원으로 이끈 것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그들을 구원하였다는 것이다. 구원의 길은 야훼 하나님에 의해서 나타난다. 그러나 그 구원이 유대교로의 개종을 의미하였는가는 두고 보아야 할 문제이다. 성서는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 4:11)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구약성서의 구원의 보편성은 구약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함의를 지닌다. 아브라함은 그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창 12:3) 이스라엘백성은 모든 민족 가운데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사명을 가지고 이집트 땅을 탈출한다.(출 19:4-6) 이것은 약속된 백성인 이스라엘 또는 믿음의 인물들만 구원을 받게 하겠다는 배타주의도 아니며, 결코 종교다원사회의 상황을 단순히 인정하고 묵인하는 차원의 다원주의적인 말씀도 아니다. 하나님
은 세계에 대한 그분의 보편적 구원의 섭리 속에서 역사 가운데 행동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된다.
구약성서 중 특히 예언서에는 이방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분명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사 17-21, 렘 46-50, 암 1, 나 1 등) 그리고 그것은 이방인에 대한 심판과 구원의 계시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갇혀있는 민족신이 아니라는 것이며,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문이 열려있다는 희망의 말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구약성서의 보편적 구원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다고 믿는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세계는 모두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되었다. 하나님의 구원과 계시는이스라엘을 넘어 보편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구원이 과연 무규범적인 현재 상태를 지칭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신약성서 중 특히 바울서신에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롬 1:16-17)
그렇다면 결국 성서가 이야기하는 것은 배타주의인가?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지 않는 이들은 결국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신약성서 안에 이러한 심판론에 대비되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또한 발견할 수 있다.7)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화평이 되시는 분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이 세상의 담을 그 육체로 허무셨다.(엡 2:14)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모든 피조물들은 자신의 고대하는 것의 실현을 보았다.(롬 8:18-25) 한 사람 아담을 통하여 전 인류가 죄와 죽음의 아래에 들어갔다면, 이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 인류는 생명 안에서 왕 노릇을 하게 되었다.(롬 5:12-21)
그렇다면 사뭇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신약성서의 이러한 말씀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것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빛 아래에서 읽어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말하는 구원은 결코 중간지대나 어중간하고 흐지부지한 삶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결단과 순종, 거부와 불신앙의 구분점 위에 서있다. 즉 십자가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구원의 길은 우리의 실존을 향한 하나님의 도전이다. 그것은 선택과 믿음의 문제이며, 구원과 저주의 양자택일의 문제이다.
십자가를 붙드는 자는 죽은 것 같으나 살았고, 십자가를 저버리는 자는 산 것 같으나 죽은 사람이다. 이것은 영속적이고 현재적인 측면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결단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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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명용,『이 시대의 바른 기독교 사상』(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0), 297

성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승리를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사망과 죄가 왕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성령의 우리의 주인이 되신다. 부활의 빛 아래에서 우리는 구원이 보편적이고 만유를 향해 열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8)
또한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구원관을 우리는 종말 또는 새창조의 빛 아래에서 읽어야 한다. 신약성서는 결코 “오늘 예수 믿으면 내일 천국간다”는 식의 도식화된 싸구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이다.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은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실 하나님의 구원이 사역을 소망하며 바라보는 것이다.(계 21:5)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현재적 관점에서 선택과 유기의 측면으로 접근하는 것은 단편적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과거에 그리스도를 통
하여 계시되면 완성된 구원의 사건과 미래에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새창조에 대한 기대가 현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9) 이와 같이 구원론의 관점으로 성서를 조망하면, 성서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은 먼저 보편적으로 개방되어 있으며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리라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구원이 결코 다원적인 측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하
다.(계 19:1)

IV. 타종교에 대한 구원론적 해석

앞서 35년간의 인도 선교활동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온 레슬리 뉴비긴을 언급한 바 있다. 레슬리 뉴비긴은 그의 책 『다원주의와 복음』에서 기독교의 성급한 배타주의와 포용주의를 모두 비판하면서 다음과같이 주장했다. 타종교의 문제에서 “누가 구원 받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그 출발부터 잘못됐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구원의 길임을 강조한 나머지 마치 기독교도인 자신이 구원의 기준이라고 착각을 해왔다. 즉, 기독교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심판자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권이 마치 우리에게 있다는 듯이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단단히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10)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인을 접할 때 개종의 대상 또는 저주받을 사탄의 하수인으로 보기보다는 대화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타종교가 옳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타종교를 그분의 구원 사역에 타종교인들 또한 포함하시기 때문이다.
오늘날 종교다원사회 상황 속에 있는 한국교회는 바로 이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즉 예수는 그리스도시며 구원의 길이지만, 그 범위와 한계에 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톨릭 신학자 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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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Moltmann, Juergen, 이신건 옮김,『희망의 신학 : 그리스도교적 종말론의 근거와 의미에 대한 연구』(서울 : 대한기
독교서회, 2002), 157-164.
9) 김명용, 254-257.
10) Newbigin, Lesslie, 328-329.

큉은 이러한 태도를 두고 중립의 신학이라며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한 답변을 회피하거나 분명한 색깔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한과 책임의 답변을 인간이 성급하게 내지 않으려는 신중한 판단이요 분명한 기독교의 색깔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관의 차이가 가져오는 변화는 매우 크다. 먼저 기독교는 자신의 정체성을 보다 확고히 할수 있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정체성인 -신앙고백- “예수가 그리스도시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며 강조할 수있다. 이는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No other name?) 구원을 받느냐는 질문에 “그렇다! 다른 복음은 없다!”No other gospel!)고 응답하는 것이다.11)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외에 다른 구원의 가능성을 알지못한다. 그리고 성서적 증언 아래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의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유일성과 절대성, 그리고 궁극성의 영역이 어디까지 가능한지에 대해서는함부로 선을 긋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타종교와의 대화와 공존의 가능성의 영역이다. 더불어 타종교에 대한 섣부른 정죄와 판단보다는 우선 상호공존에의 인정을 통하여 적절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러한 타종교와의 관계 이해에 대하여 비판의 목소리가 개진될 수 있다. 이 입장은 결국 민감한 사항을 교묘히 빠져 나가면서 정작 중요한 논점은 간과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입장과 로마 가톨릭의 포용주의는 무슨 차이인가? 그러나 본문은 앞서 기독교가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가지는 가장 큰 문제를 구원론으로 상정하였고, 그외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논의와 협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즉 본문은 타종교와의 관계문제를 구원론으로 제한한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가 타종교와의 관계 속에서 가지는 문제 사항은 구원론을 제외하고는 크게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미 수많은 타종교인들은 그들의 관점으로 예수를 이해하고 모범을 삼고있다. 마하트마로 불린 인도의 성자 간디는 예수의 산상수훈에 영감을 받아 비폭력 항쟁을 이끌었고, 이슬람교의 경전이 코란은 예수를 위대한 예언자로 인정하며 예수의 부활과 승천 기사까지 경전에 포함시키고있다. 또한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타종교의 통찰을 빌어 기독교의 메시지를 재해석하고 있다. 노자와 장자의 철학이 신학계에 미치는 영향과 불교와의 비교종교학적 연구를 비롯하여, 이현주목사와 같은 작가는 동양의 사상과 기독교의 메시지를 접목하는 글을 발표하여 많은 애독자 층을 보유하고있다. 즉 구원론에 대한 이해관계를 제외하고는, 이미 수많은 영역에서 간종교적 연구와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본문이 주장하는 구원론이 로마 가톨릭의 포용주의와 다른 이유는, 이 구원론은 타종교인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제멋대로 상정하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포용주의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중심적인 사고, 특별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중심적인 사고로 타종교를 수용 또는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있다.12) 이는 성서에 위배되는 행위이다. 성서적 정신은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믿고 고백하는자를 하나님의 백성 또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칭하고 있다.13) 성서는 절대로 선심을 쓰는 척하며 타종교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칭하거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있지는 않다. 우리가 분명히 구분을 지어야하는 것은 기독교와 타종교는 엄연한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구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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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Braaten, Carl, 김명용 옮김,『다른 복음은 없다!』(서울: 성지, 1999), 3.
12) 칼 라너의 종교신학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찬수, “현대종교신학의 흐름<3>:칼 라너의 종교신학” 『사목』1994년 3월호(통권 제182호)를 참조하라
13) Newbigin, Lesslie, 325.

수많은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분명 다른 종교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기독교와 경전도 같고, 역사도 같지만 엄연히 다른 종교이다. 즉 비슷한 윤리나 영성 또는 비슷한 가르침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이것은 초대교회로부터 기독교가 끊임없이 싸워왔던 ‘사도적교회’의 모습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우리는 타종교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계시된다고 증언할 따름이다. 선심을 쓰는 척하며 타종교도기독교와 유사하다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에도 모독이며 타종교에도 수치가 된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이며 같은 것은 같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성서가 증언하는 신앙은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 할 수 있는것이 아니다. 포용주의는 바로 이점에서 성서적인 기독교의 구원이해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제에서 먼저 우리는 우리가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위치에 서는 것과 스스로 자비의 군주가 되는 것과 같은 양극단의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14)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겸손하게기다리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러한 태도는 기존의 기독교에게도 도전을 준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입으로 시인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현 상태에 안주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것이다.15)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한 나머지 삶 속에서 구원을 이루려는 결의와 행동에는 매우 미약한 모습을 보인다. 마치 천국행 보증수표를 받은 사람처럼 안일하고 나태한 모습으로 삶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성서적 의미의 구원을 보았을 때,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참람한 모습임에 틀림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승리를 호언장담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참된 신앙이 아닌 형식과 모양의 신앙은 결국 이방신과 민족에게 언약궤를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했다.(삼상 4:1-11)
즉 새롭게 재구성된 구원론에 있어 그 대상은 비단 타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우리 앞에 변증법적 긴장상태를 던져 놓는다. 기독교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빛을 가장 온전히 담지하고 있는 종교라 할지라도, 그 안에 참된 신앙과 삶이 없다면 기독교 또한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타종교가 아무리 하나님의 참된 계시를 바로 알지 못하고 헛된 것을 경배하고 있지만, 그들 또한하나님의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구원의 섭리 속에 정초되어 있다. 그러므로 종교다원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이중적인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ES!”E와 "NO!"라는 음성이다.

V. 오늘날의 그리스도 신앙과 교회의 선교

구원론의 관점에서 재구성된 타종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이제 새로운 차원의 대화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오늘날 시대에 종교가 어떤 부분에서 유의미해질 수 있는가의 차원이다. 과거 자연과학자들이나 인문학자들 심지어 세속화신학자들은 예견하길, 시대가 지날수록 종교의 자리는 축소되고 아마도 사라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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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Newbigin, Lesslie, 329.
15) 같은 책, 330.

주장했다. 자연과학의 발전된 문명과 기술이 종교의 신비적이고 미신적인 세계 이해를 대체하리라 보았고, 계몽된 인간은 신이라는 근원적 가정이 없이도 자신의 삶을 유의미하게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했다. 이제 역사는 무의미의 혼돈 속에 빠져있다. 자연과학의 발전은 문명의 놀라운 발전을 가져다 준 동시에 생태계의 위기와 핵의 위협으로 생태계의 생존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인문학은 사장될 위기에 빠져있으며 철학은 스스로 죽음을 공언하고 있다. 공산주의에 대한 확고한 승리로 보였던 자본주의와 시장은 각종 경제 위기들과 신자유주의적인 비인간화로 인해 사회의 곳곳에서 조정과 시정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칸트가 인간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니체가 신을 죽음을 선언한 이후, 인간은 스스로에 의해 노예가 되었고 결국 인간이 죽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와 영성은 인류에게 다시금 새로운 대안이 되고 있다. 종교는 죽음의 문턱에서 제2의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이러한 사회의 종교적 복고주의는 기독교에게 위기이자 새로운 기회의 요소로 작용한다. 사회의 종교적 복고주의의 위험요소는 먼저 이러한 종교적 요구와 필요성이 혼합주의적인 종교성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이다. 종교가 대형마트의 상품처럼 진열되어 있는 현대의 종교이해에서는 기독교역시 하나의 상품처럼 취급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는 더 이상 생명을 걸고 믿음을 지켜야 하는 신앙이 아니라 취사선택이 가능한 신념체계 또는 가치체계로 전락할 수 있다. 이는 기독교 제국주의만큼이나 위험한 기독교의 상품화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이러한 종교혼합주의 양식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매트릭스』스토리의 주요 모티브는 기독교의 메시아 고대 사상이다. 영화의 스토리는 가상 세계 매트릭스에서 인간들을 구원시켜줄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주인공 네오는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결국 인간들을 가상 세계인 매트릭스에서 구원해주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영화의 시종일관 기독교의 메시아사상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심지어 영화의 주인공들의 이름도 성경에서 모티브를 찾았고, 주인공 네오는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다. 그러나 영화는 중간 중간 흰두교적 윤회사상과, 세계는 허상에 불과하고 실체는 없다는 불교적 분위기를 내비치고 있다. 영화 『매트릭스』는 오늘날 새롭게 각색된 혼합종교적 양식이 얼마나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또한 현대사회의 종교적 복고주의는 기독교의 사회적이며 공적이 활동과 영역을 제한하며, 종교란 단지 내면의 만족과 인격의 도야 등을 실현하는 내재적 필요성을 충족시키려는 수단으로 전락되고 있다. 이제 종교는 사적인 영역이 되었으며 보다 더욱 신비로운 특징으로 구별되고 있다. 종교는 더 이상 사회에 통합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기여할 수 없게 되었고, 단지 ‘빈 구석’을 채우는 수단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역할이 현대사회의 종교적 복고주의를 활성화시킨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성은 기독교의 십자가신학을 무색하게 하는 “결단이 없는 종교”로 변질된다.16)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곳곳에 산재한 위기와 문제를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자칫 타종교와 기독교가 혼합주의로 변모하거나, 상업주의에 의해 전락하거나, 내면의 만족으로 점철될 수 있는 위기이다. 그러나 이 모든 위기와 문제를 오늘날 기독교와 타종교가 함께 해쳐나가야 할 사명으로 본다면 이 모든 것들이 다시금 기회로 다가올 수 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오늘의 사회는 인간의 실패와 죽음을 증명하고 있다. 사회의 곳곳에서는 근대적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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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Moltmann, Juergen,『희망의 신학』, 340.

래의 청사진이 갈기갈기 찢어져 버린 잔재들이 발견된다. 물론 현대사회는 다양한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학문과 전문분야들이 있다. 그러나 극도로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각계각층의 전문분야들은 모두 저마다의 전문적 소견을 제시할 수 있을 뿐 사회의 대통합적인 대안과 윤리를 제시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는 더욱 더 그 공적인 역할로의 요청을 받게 된다. 이미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흑인 인권운동과 80년대와 9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해방신학적 운동은, 종교의 사회 통합적 기능의 가능성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다.17)
일찍이 종교 간의 평화와 세계 윤리를 주장한 바 있는 한스 큉은 오늘날 대소 종교의 지도자들이 평화, 이웃 사랑, 비폭력, 화해 그리고 용서에 대해서 자신들이 져야 할 책임을 단호하게 표명한다면 인류의 역사는 달라질 것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18) 오늘날의 실용주의 일색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과연 종교가 얼마나 유의미한가라는 질문도 제기될 수 있지만, 여전히 종교는 인간의 삶의 의미와 자유, 본질과 실존, 현세적 문제와 궁극적 문제에 답변하는 기능으로 신뢰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불교계의 비리와 폐단이 많다는 사실은 대부분이 알고 있지만 여전히 불교계의 영향력은 놀랍기만 하다. 현대인들은 더 이상 지도자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한경직 목사님이나 성철 스님, 김수환 추기경 같은 훌륭했던 종교지도자의 서거에 애도를 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종교의 새로운 가능성을 지켜볼 수 있다. 그것은 첫째로 근대주의가 인간을 비인간화한 모든 제도와 형태에 대하여 종교는 안식을 선사할 수 있다. 둘째로 사회의 분열과 윤리적 기준의 부재 상황에 대해 종교는 모범적이며 사회 통합적인 역할에 기여할 수 있다.19)
본문은 앞서 타종교와의 관계 문제에 있어서 구원의 문제를 우리의 현재적 차원에서 성급하게 결론내리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맡기면, 종교 간의 협력과 활동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있다고주장했다. 이것은 단순히 낙관주의적인 종교이해가 아니며 비현실적인 이상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는 자기 변혁적 시도이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늘날 종교는 전락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현실적 대안이다. 그렇다면 타종교와의 협력과 공존을 추구하기로 결의한 이후 기독교의 신학과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며 또 할 수 있는가? 결론은 선교이다. 이와 같은 결론을 두고 논란의 여지가 많을 수 있다. 타종교를 존재와 심지어 구원의 가능성까지도 인정한다면서 어떻게 감히 선교를 언급할 수 있는가? 타종교와의 협력과 공존을 추구한다면서 선교를 강조하는 것은, 협력은커녕 종교의 더 큰 반목과 대립 및 경쟁을 야기할 수 있지않은가?
그러나 위와 같은 질문과 문제제기는 선교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에서 비롯된다. 선교란 일차적으로 교회를 성장시키고 교세를 늘이고 불신자를 개종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차후의 진행사항이며 부가적인 현상이다. 선교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소식인 복음을 증언하고 세계를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초청하는 것을 의미한다.20) 즉 타종교와의 대립을 넘어서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건을 증언하고이 세계의 창조공동체를 사랑하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사건을 선포하고 그 사랑으로 세계를 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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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Kung, Hans, 안명옥 옮김, 『세계윤리구상』(왜관 : 분도출판사, 1992), 150-151.
18) 같은 책, 153.
19) Moltmann, Juergen,『희망의 신학』, 354-363.
20) 한국일, 212-213, 234.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며 그 역사를 소망으로 하여 세계에 뛰어드는 것이다. 선교는 기독교의 본질이며 본래적인 사명이다. 타종교와의 협력을 빌미로 선교를 게을리 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다.21) 그러므로 타종교와의 협력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 신앙이 가져야 하는 자세는 타종교와의 대화적 공존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적 의식을 잃지 않는 것이다. 타종교와의 대화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내버리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하고, 선교에 열을 올리는 나머지 교세확장과 교파주의에 빠지는 우를 범해서는안 된다.

VI. 나가는 말 - 나의 이야기

논문의 시작을 개인적으로 이야기로 시작했던 만큼 논문의 마지막도 개인적인 이야기로 마무리 지으려한다. 필자가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부 신학과에 재학 중이던 2006년도 당시, 수업 중 종교다원주의에 대한발표를 담당하게 되었다. 고민 끝에 이론 소개 중심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실시하기로했다. 일반 시민들에게 무작위로 실시하는 인터뷰였던 만큼 선입견을 갖지 않도록, 장신대가 아닌 다른 조사 기관에서 나온 것처럼 질문을 던졌다. 질문은 크게 3가지로 했다. 현재 종교를 가지고 있으십니까? 개신교, 천주교, 불교 중 가장 선호하거나 또는 혐오하는 종교는 무엇입니까? (타종교도 답변 가능)각각 선호와 혐오의 이유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필자는 캠코더를 가지고 행인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상황을 설명하고 인터뷰에 응해줄 것을 정중히 부탁했다. 약 20여명의 시민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결과는 놀라웠다. 개신교를 선호한다는 시민은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개신교를 가장 선호하고 신뢰한다는 시민 역시 한 사람도 만날 수 없었다! 그 중에는 심지어 과거에 교회를 다녔거나 현재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시민들에게 개신교를 왜 싫어하냐고 이유를 물었더니 가장 많은 사람이 답변한 내용이 개신교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필자는 시민들이 답변한 내용이 충분한 숙고와 관찰을 통해 얻어진 결론이라고 보지 않았다. 보통의 경우 시민들이 개신교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언론이나 인터넷 등에서 흘려들은 풍문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결같이 비슷한 답변이 나온 것은 분명 간과할 문제가 아니었다. 필자는 수업 중 발표 시간에 인터뷰 동영상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오늘날 교회와 신학계에 필요한 것은 종교간 대화의 시도라고 주장했다. 발표를 마치니 한 학생이 필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발표자는 타종교의 구원의 가능성을 믿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필자는 그렇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학생들 사이에서는 편이 갈렸다! 기독교가 종교적 대화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과 타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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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Bosch, David, 김병길, 장훈태 옮김,『변화하고 있는 선교 : 선교 신학의 패러다임 변천』(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34.


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에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토론은 격렬해졌고 결국 의견조차 좁히지 못한 채 수업을 마쳤다. 필자는 현재 교계와 신학계의 상황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종교다원주의가 논의된 지가 벌써 40여년이나 되었지만, 국내의 분위기는 여전히 언급 자체가 조심스러운 실정이다. 필자에게 강의를 하시던 교수님도 지나가는 말로 이런 얘기 교회에서는 하지 말라고, 교인들 상처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도대체 무슨 논리란 말인가? 어느 순간부터 종교다원주의는 입 밖에도 내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기독교는 초대 교회로부터 지금까지 도전과 위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는 언제나 도전과 위기에 대하여 시대적 사명감을 느끼고 적절하게 대처해왔다. 물론 그 대처방식에 문제가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코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논의를 터부시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본 논문은 지금까지 타종교의 구원의 문제와 오늘날의 그리스도 신앙이란 무엇이며 어떤 모습이어야하는가에 대해 의견을 개진했다. 우리는 이제 이에 대한 논의를 일회적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통합적이고 지속적 차원에서 진행해야 한다. 300만 성도운동과 같은 강력한 선교프로그램이 있다면, 타종교와의 대화와 협력이라는 프로그램도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일방적인 주장과 선교로 많은 부분 공신력을 잃어왔다. 종교다원사회로의 진입한 오늘날 기독교 역시 환골탈태의 정신으로 자신부터 재정립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기독교는 복음의 정신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자로서, 복음의 확신을 가지고 동시에 타종교와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2009-10-30 00:14:33
121.xxx.xxx.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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